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희 May 11. 2019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5.11

39. 숙제


하루가 끝나갑니다. 오늘은 대체 무엇을 써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에라,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되지 않을까 게으름과의 내적 갈등을 빚은 다음 그래도 뭐라도 쓰자 싶어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어, 그동안 반복했던 표현을 무감각하게 늘어놓으며 한 글자 한 글자 꾸역꾸역 늘려나갑니다. 글을 쓰는 목적을 반추해보니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주제를 정하려고 그동안 썼던 글을 둘러보는데 문득 머릿속에 스치고 간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숙제였습니다. 마치 숙제처럼, 글쓰기를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무언가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야 한다면 이게 숙제지 뭐가 숙제겠습니까!


하얀 화면을 앞에 두고 있을 때면 항상 이런 느낌이죠.


주제가 정해지니 일사천리입니다. 곧장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과제와 시험공부는 직전에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밤을 새워가며 부랴부랴 끝을 내고 퀭한 눈으로 수업에 참석해 제출하기가 일쑤였지요. 비교적 여유가 있는 과제, 가령 개강날 공지되어 학기말에 제출해야 할 과제도 제출을 일주일 앞두고, 아니, 일주일이 뭡니까, 이틀 남짓 남았을 때부터 준비해 각성제의 힘을 빌려가며 간신히 끝내곤 했습니다. 성실하고는 거리가 멀었죠. 하기 싫은 일은 어떻게든 미뤘다가, 도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순간이 되지 않고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자랑은 아니지만, 이런 면에서는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일관적이긴 했군요.


좀 더 과거로 돌아가 볼까요? 제 인생에서 과제뿐 아니라 할 일을 기한에 맞추는 정도의 성실함을 함양했던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 저는 불성실한 건 아니지만, 간신히 제출기한에만 맞추는 학생이 되었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도 그랬습니다. 싫은 소리를 쉴 새 없이 늘어놓으면서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억지로 했습니다. 아마 군소리 없이 공부를 했던 건 고3이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면 표정에 감정을 다 드러내면서, 마지못해 했죠. 군대 때는 이런 태도가 여러모로 문제가 되어서 억지로라도 고쳐야 했습니다. 글쎄요. 하기 싫은 일을 하는데 표정이 좋을 수 없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군대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럼 어째서 숙제는 하기 싫은 것일까요?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남이 시켰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자기 계발서나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언을 주는 글을 읽을 때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거기서 의미를 찾고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물론 그럴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하루아침에 개조될 만큼 말랑말랑한 성질의 것은 아니죠. 더욱이 본인이 그럴 필요를 느낀다면 모를까, 타인이 강요할 것도 아니기도 하고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그래도 숙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덧 오늘의 숙제도 하나 마무리되어 갑니다. 써먹기 좋은 소재를 하나 벌써 날려먹었나 싶어 후회가 되기도 하는데, 어쩌겠습니까. 이렇게라도 또 한 편의 글을 쓰는 게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가올 또 다른 숙제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그 때는 또 그 때의 제가 알아서 잘 대처하리라 믿고,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미루고 있던 숙제가 있다면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해놓으시는 건 어떨까요. 만약 기한이 내일까지라면……, 오늘 밤을 불태울 당신에게 건투를 빌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5.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