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일기 스물두 번째
강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아는만큼 보인다'를 절감했던 때는 '반려동물 입장 가능'이 붙어 있는 매장을 발견할 때였다. 분명히 오다가다 보았던 곳인데 그 안에 강아지나 고양이가 앉아 있으면 깜짝 놀라서 다시 보게 된다. 저기 동물 입장 가능이구나, 오오... 발견하는 즉시 해당 매장에 무한한 친밀감이 생기면서 나는 충성도 높은 예비 고객의 마음이 되어버린다. 카페건 식당이건 휴대전화 판매 매장이건(전화기 교체 계획이 전혀 없는데도) 상관 없이 '곧, 꼭! 가봐야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검색을 하다 우연히 한 지역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강아지를 안고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와 음료를 픽업해 간 사람을 목격했다며 "황당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댓글에는 '개념 없다', '이기적이다' 같은, 강아지를 안고 매장을 찾은 사람의 무례(?)를 지적하는 말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는 그저 스타벅스에는 후추를 데리고 갈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점차 '잠깐, 음료를 픽업해가는 것인데도? 반려동물 입장이 가능한 카페들도 있잖아? 거기랑 스타벅스는 뭐가 다른 거지?' 하는 질문들로 빠져들었다.
집 근처의 작은 공원에도 '애견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있다. 그곳은 어린이 놀이터를 겸한 곳인데 역시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지금은 지나칠 때마다 마음이 조금 일그러지곤 한다. 어떤 곳은 결코 후추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받아들이자고 흩어지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면서도 아쉬워진다. 더구나 그 공원은 외진 곳에 있어서 어린이가 노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고, 작은 공간에 미끄럼틀 같은 놀이기구가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강아지가 활발하게 다닐 공간도 없다. 그런데도 굳이 그 팻말을 건 데에 담긴 배제의 마음이, 차별의 마음이(혹은 관성적인 게으름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동네에 모든 메뉴가 맛있어서 종종 포장을 해다 먹는(코로나 시대에 발견한 곳으로, 매장에서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젠가 매장에서 식사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비스트로가 있다. 식사도 되고, 술도 되는 그런 곳이다. 그곳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테라스 자리에 예쁘게 앉아 있는 강아지들 사진이 자주 올라온다. 역시 BH 시절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어쨌든 강아지들이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것이 대번에 반가웠는데 자세히 보니 시간 제한이 있었다. 오후 5시까지 가능. 어쩔 수 없이 아쉬워서 저녁이 되면 강아지 입장이 안 되는 이유를 따져가며 궁금해하다가 '컵에 물이 절반이나 있네!' 하는 심정으로 이곳 사장님의 고민을 헤아려보았다. 완전히 오픈하면 더욱 좋았겠지만 시간 제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고민이 분명히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이 기대 섞인 짐작이 아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실내 매장의 기둥에 센스 있게 붙어 있는 사진들을 보면 주인장은 고양이 집사인 듯했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믿어보고 있다.
반려동물 입장을 몇 시까지만 가능하게 하겠다, 고 걸어두는 매장 사장님의 마음에 그나마 고마움을 느낄 정도로 나는 '노펫'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렵다.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그 무수한 똥들을 생각하면 모든 반려인들이 기대처럼 타인을 배려하며 반려생활을 하는 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끔 뉴스에서 마주치는 반려견 물림 사고 문제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존재들은 낱개의 문제가 전체의 문제로 과잉 이해되고, 쉽게 배제의 영역으로 떨어져버린다는 점에서 나는 끝내 이 문제를 '그럴 수 있다' 영역에 놓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세련된 노인'이나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 손님으로 받는다고 하면 당장 문제라고 할 것을, 왜 어린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걸까? 중요한 차이가 있긴 하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어린이라는 세계』, 209-211쪽)"
노키즈존은 어떤가.
(얘기가 왜 갑자기 노키즈존으로 튀냐고 의아할 사람들이 있을까? 꽤 높은 확률로 노키즈존 영업장은 노펫존이라고도 써붙여 놓는다. 검색창에 '노펫존'을 입력해서 보면 금방 알게 된다.)
어린이와 동반할 일이 많지 않지만 나에게 노키즈존은 대표적인 차별의 공간이다. 이 문제로는 지인들과도 여러 번 논쟁을 벌인 적이 있을 정도인데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기만 해도 -그가 어떤 문제적 행동을 하기 전에- 다른 카테고리에 넣어버리는 것 같다. 한 번은 친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어린이와 함께 식당에 갔는데 딱히 '노키즈존'이라고 써붙이진 않았지만 자꾸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초리가 느껴져 음식을 서둘러 먹고 나왔다는 것이다. 공교로운 것은 얼마 뒤 '풀메이크업'을 하고 같은 식당에 갔을 때는 그런 눈초리를 느끼지 못했다고, 친구는 씁쓸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어린이가 식당에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는데 보호자가 제지를 하지 않더라, 어린이가 식기를 깨트리는 걸 봤다, 식사하는데 기저귀를 갈더라... 같은 이야기를 아마 강아지에게도 할 수 있겠지. 결국 통제가 안 된다는 말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많은 어린이들은 보호자와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는 존재들, 예의와 사회적 활동을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내가 본 많은 강아지들은 외부 공간에서 통제불가로 뛰어다니거나(그런 강아지들은 애초에 식당에 데려오지도 못할 테고) 타인에게 마구 접근하지 않는다(오히려 사람이 '귀엽다'면서 무례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설령 어린이나 강아지가 말썽을 부린다고 해도 그것이 그 범주의 존재들 전체를 입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한 명의 어린이, 한 마리의 개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서 모든 어린이, 모든 개를 거부하겠다는 것은 역시나 명백한 혐오이자 차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다양한 존재들을 자주 마주치며 살아가는 일은 그 '다른' 존재들을 위해 좋을 뿐 아니라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인을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글이나 화면의 바깥에서 실제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을 직접 보고 나면 그들이 조금은 내 삶으로 들어오고, 그만큼 내 삶의 반경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후추를 알기 전 내 삶의 반경과 알고 난 뒤의 반경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면, 나는 더 다양한 존재들을 나의 일상에서 만나고 싶다고 바라게 된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가진 고민을 엿보고, 그 고민을 나의 고민과 엮어가며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공원에서 어린이와 강아지가 어색함 없이 만날 수 있다면, 카페에서 사람들과 강아지가 긴장 없이 마주칠 수 있다면, 식당에서 사람들과 강아지가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그럴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존재만으로 차별하지 않고 웃으며 만날 기회를 자주 내 삶에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관용과 여유가 우리에게는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