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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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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l 01. 2021

너의 시선으로 본다면

후추일기 열일곱 번째


후추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무엇을 하든 따라와서 '그게 뭐 하는 행동인지?' 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후추가 알기 쉽도록 설명을 하는데 이를테면 "이건 재활용 할 쓰레기를 따로 모으는 거야"라거나 "나 땀 흘렸으니까 물샤워 좀 할게", 또는 "택배 왔다!", "먼지 너무 많으면 재채기 나와, 후추야. 이거 치워야 돼" 같은 말들을 주절주절 하는 것이다. 알아 듣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뜻밖에도 그 시선이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걸 매일매일 느낀다. 후추의 시선 덕분에 요즘은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오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네? 이게 뭐 하는 행동이지?' 라고 되묻는 일이 많아졌다. BH 시절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하던 나의 어떤 행동들을 후추의 시선으로 의식하고 있다.


전기 사용이 그렇다. 시각은 물론 뛰어난 후각과 청각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후추는 조금 어두워도 세상을 감각하는 데 큰 제한이 없는 듯하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배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서 눈치를 챈다. 그런 후추의 시선으로 나를 보니 대낮에도 집안의 전등을 켜는 일이 꽤 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분명한 빛이 있는데도 주방에 가서, 화장실에 갈 때 전등을 켜고, 때로는 깜빡 잊고 켜둔 채 생활하다니. 후추의 시선을 느끼자 낮에는 가능한 한 전등을 켜지 말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습을 해보니 나는 조금 어두운 것을 편안해 한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았다. 덕분에 요즘은 아예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리기 전까지는 집안의 전등을 가급적 켜지 않은 채 생활한다. 며칠만 연습해도 꽤 익숙해지는 일들이고, 전기 사용을 나의 오후만큼 매일 줄여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상의 레벨업을 이뤘다고, 혼자서 뿌듯해할 수 있다.


물 사용도 마찬가지다. 후추의 시선으로 보면 이렇게까지 물을 사용할 일이 아닌 것투성이다. 그 어느 때보다 손과 몸의 청결이 중요해진 시기지만 후추의 시선으로 보면 불필요한 물 사용도 꽤 많다. 설거지를 할 때나 샤워할 때, 그냥 물을 틀어놓고 흘려보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의식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나 꽤나 물을 아끼며 사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비누칠을 하는 도중에는 반드시 수도를 잠근다.


후추는 한 달에 한 번 목욕한다. 그래도 몸이 깔끔하다. 스스로가 매일 부지런히 털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름으로 자신의 청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에 필요한 에너지가 자신의 침과 혀의 운동이라니.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모르겠다. 당연히 후추처럼 한 달에 한 번 목욕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인간 위생의 역사는 인간의 수명 연장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그 이상의 행위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런 장면. 머리를 감느라 샴푸를 하고, 물로 헹군다. 머리 감는 행위는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드러운 머릿결'을 위해 트리트먼트를 하니까. 그렇게 욕실에서 나오면 다시 드라이기를 이용해 머리를 말린다. 머리가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를 위해서다. 내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이 일련의 과정이 이제는 꽤나 낭비처럼 느껴진다. 후추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니 말이다. 씻고 나온 뒤에는 어떤가. 화장솜에 스킨을 묻혀 얼굴을 또 닦아낸다. 피부를 위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후추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니 '꼭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길게 남는 것이다. 마음은 차곡차곡 불편해진다.


좀 더 들어가자면, 인간은 몸을 꾸미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어느 '마음이 동한 날'에 비비크림이라도 바르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클렌징 오일을 사용해 얼굴을 닦아내고, 다시 폼클렌징을 사용해 2차 세안을 하는 것으로 세안을 마친다. 스킨과 에센스, 각종 기능성 크림과 때때로 하는 마스크팩까지. 그 화장품들을 담고 있는 용기는 거의 플라스틱 제품이고, 마스크팩은 비닐 포장이 되어 있다. 그토록 짧은 사용주기를 가진 제품들을 '미용'이라는 이유로 사용하고 있었다. 후추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지금 사용하는 것들을 다 사용하고 나면 어떤 것은 사용을 중단하고, 어떤 것은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제품으로 바꿔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현재 아주 만족하며 사용하는 제품은 '동구밭'의 설거지 비누와 샴푸바 제품이다. 꾸준히 사용할 예정이다.)


작년의 길고 길었던 장마, 꺼질 줄 모르는 코로나19라는 낯선 충격, 아마존 토착 부족 지도자의 살해 소식과 빙하 유실 등. 나는 이것들이 내 사소한 선택과 행위에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유별나게 느껴질까봐 때로 사용했던, 대안을 찾지 못해 쓰던 대로 써온 온갖 플라스틱 제품들과 사소한 욕망으로 소비해온 다양한 제품들과 서비스가 실은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그림자가 너무 커져서 이제는 우리 모두를 뒤덮는 중이라는 것도. 어떻게든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은 긴장의 끈이 꽤 팽팽해진 것 같다.


후추의 시선을 따라가다 우울한 이야기를 했지만 한편 멋진 점도 있다. 식물을 돌볼 때 후추의 시선은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왜냐하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 중인지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행위가 후추와 나에게, 지구에게 해가 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이 무엇보다 뿌듯하다. 가슴이 편안하게 펼쳐지는 기분이랄까.(그래서 요즘 자꾸 집에 데려오고 싶은 식물 목록이 길어지는 것은 비밀이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후추한테 당당하게 설명할 일들만 하고 싶다, 라고. 그래서인가. 요즘 우리집 유행어는 "후추가 선생이다"이다. 맞다. 후추야말로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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