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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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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21. 2021

눈을 보며 하는 상상

후추일기 열다섯 번째


대화를 나눌 때, 말하는 편보다는 듣는 편을 더 좋아한다. 말을 많이 듣고 돌아설 때면 말을 많이 하고 돌아설 때보다 마음에 거리낌이 적다. 그리고. 들을 때는 상대의 눈을 응시한다. 내 눈길을 상대가 피하면 아주 조금 아쉽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칠 때 주변이 사라락 사라지는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나는 그 순간이 정말 좋다.(잠깐 샛길로 빠지면, 나는 그 이유로 학창시절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모범 학생이었다. 성적과는 상관 없는 얘기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꼭 맞추고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난 그 시간도 좋아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말을 할 때는 이따금 다른 곳에 눈을 두게 된다. 의식적인 것은 아닌데 그러고 있다는 걸 의식할 때가 있다. 다른 데 뒀던 눈을 다시 상대의 눈으로 가져가 말을 잇는다. 곧 주변은 사라락 사라지고. 마법 같은 순간을 되찾는다.


기쁘게도 후추와는 그런 마법을 매일 경험한다.


강아지들은 인간의 눈을 마주보는 것으로 말을 하는 걸까. 후추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눈길을 끊임없이 보낸다. 그리고 마주친 눈길을 꼭 붙잡는다.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눈을 마주하고 있다. 그 동그랗고 깊은, 까만 눈. 그 눈으로 "놀자"라고 말하고, "간식 줘"라고 말한다. 졸려서 잠에 빠질 때 후추의 눈은 예의 그 '말 거는 눈빛'을 서서히 거둔다. 정말로 채도가 달라진다. 그 차이를 이제 나는 알아볼 수 있다.


한편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날 좋아해?

너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를 의지하고 있어?


후추의 눈에 순수한 애정과 거대한 다정과 깨끗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눈을 마주 보면서 자주 이런 상상을 한다.


어느 멀고 먼 과거에, 사냥감을 찾아 주거지를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는 인간 무리 주변으로 늑대들이 기웃거린다. 이들은 인간이 먹고 남긴 음식을 조금씩 훔쳐 먹는다. 그러다 어떤 늙은 늑대 또는 작고 온순한 늑대가 인간 곁에 머물기 시작한다. 인간은 그 늑대의 존재를 인식한다. 둘은 눈을 맞추고 서로가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한다. 인간은 그 늑대를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게 사냥에도 도움이 된다. 귀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따뜻한 불 곁에 앉아 쉴 수 있게 한다. 이제 그 늑대가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개로 남기로 한다. 인간과 늑대가 인간과 개로서 놀라운 동행을 시작한다.

그런 순간. 나는 후추의 눈을 보며 그 놀라운 순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는 동물 행동 과학자인 저자가 개가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과학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에 따르면 개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함께 있을 때 심장박동 속도가 비슷해지듯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과 함께 있을 때 심장박동 속도가 비슷해진다. 개는 15초에 한 번 간식을 주는 사람과 즉시 목을 문지르며 칭찬하는 사람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 칭찬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또 개들은 '윌리엄스-뷰렌 증후군'에 책임이 있는 유전자와 유사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윌리엄스-뷰렌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라는 개념이 없다. 이들은 "외향적이고 극도로 사교적이며, 매우 친근하고, 사랑스럽고, 타인에게 극단적인 관심을 보이며,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163쪽) 결론적으로 저자는 말한다. "개의 본질은 사랑이다."(176쪽)라고.


이런 이야기는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다. 개들이 그렇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후추는 그 먼 과거에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늑대로부터 긴긴 시간을 건너 내게 온 강아지. 나는 그 먼 과거에 늑대를 곁에 두기로 하고 온기와 음식을 나누던 인간으로부터 긴긴 시간을 건너 후추를 만난 인간.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관계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그 긴긴 시간 덕분에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유전자가 각자의 몸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후추는 졸린 눈을 하고 곁에 앉아 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후추야, 너를 사랑해. 후추는 졸린 눈을 거두고 눈으로 말한다. "나도" 하고. 이 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수천 년 전 인간 마을 근처 어딘가에서 강아지의 애달픈 낑낑거림을 처음으로 알아치라고 그 도움을 청하는 외침에 응답해 그 개의 각인 대상이 됨으로써, 이후 인간과 개, 두 종을 이어주는 유대감을 공고히 다진 이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개는 이렇게 수 세대를 아우르는 이종 간 동반 관계의 참여자가 되어왔다. 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경이로움이자 영광이다. 개에게 사랑받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자, 아마도 인간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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