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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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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16. 2021

종이 뭐예요?

후추일기 열네 번째


어느 아침 산책 도중에 맞은 편에서 두 명의 보호자와 함께 걸어오는 강아지가 보였다. 갑자기 후추는 저 강아지와 인사를 하고 싶다고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러고 앉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강아지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강아지 짖는 소리에는 혼비백산하면서 놀고 싶다고 앉은 모습이 우습다가도 두려움을 이기는 호기심과 애정에 감탄하고 말았다. 마침 저쪽에서 오던 강아지의 차분한 걸음걸이가 안심되어 함께 기다렸다. 그런데 어쩐지 그쪽 강아지 보호자들도 걱정이었나보다. 이런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보호자 1)"아이고, 다른 데로 가."

(보호자 2)"왜에- 강아지도 좀 만나게 해주고 그래야지."

(보호자 1)"얘가 흥분한단 말이야. 빨리 저리로 가."

(보호자 2)"이거 봐. 괜찮잖아. 가까이 가보자."


그 말을 고스란히 들으며, 내심 웃으며, 긴장도 하면서 나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이윽고 두 작은 털친구의 만남이 성사됐다. 어쩐 일인지 후추는 그 강아지와 사이 좋게 서로의 냄새를 맡고, 코인사를 나눴다. 이른 아침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이들이 나누는 인사와 그 인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인간 세 명이라니. 후추와 산책하게 된 뒤로 수다쟁이가 되어버린 나는 "얘가 원래 다른 강아지 보고 이렇게 다가가지 않는데 오늘은 딱 멈춰서서 앉아버리더라고요. 엄청 좋은가봐요. 짖는 강아지 무서워해서 저도 산책 다닐 때 조심하는데 둘 다 차분하네. 와, 너무 좋네요."라고 주절주절 말을 쏟아냈다. 앞서 후추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길 원했던 보호자 1도 "얘가 웬일이야? 어머, 이럴 때가 다 있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우리는 그 순간 행복했다. 그리고 보호자 1이 내게 물었다.


"강아지 이름이 뭐예요?"


우리 강아지 이름은 후추. 그 강아지 이름은 여름이.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이라고 했다. 후추는 뭐, 다른 이름이 안 붙는 애니까. "여름아 안녕!", "후추 안녕!" 여름이네와 정답게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하고 헤어지면서 강아지의 이름을 묻는 우아한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보다 종을 더 궁금해한다.


"얘는 무슨 종이에요?"라는 질문은 당황스럽다. 우선 후추는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다. 후추 엄마도 무슨 종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내가 당황스러운 것은 후추의 종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후추는 그냥 후추니까. 나는 무슨 종인지 물어오면 당신은 무슨 종이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강아지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이름 붙여 알고 싶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때로는 '믹스'라고 말을 해도 '무엇과 무엇이 섞인 믹스'라는 분석을 내놓는 사람들. 그럴 때마다 그런 구분짓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생각하게 된다. 하긴. 인간 사회는 그런 지긋지긋한 폭력으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지.


정말 좋아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필 굿>의 한 장면. 주인공 '메이'는 자신의 연인 '조지'와 길에서 핫도그를 사먹는다. 핫도그가 맛있다며 메이가 엄지를 내보이자 판매자는 메이를 향해 "Thank you, sir"라고 말한다. 완벽하게 정체화 하지 않았지만 사실 메이는 '논바이너리'다. 그런 자신을 당연히 '남자'로 보는 시선에 당사자가 어떤 불편함을 느끼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인데 이어 메이와 조지가 나누는 대화가 압권이다.


메이: 나보고 형씨(sir)라고 했어. 들었어?

조지: 응.

메이: 다들 나를 남자로 봐. 그런데 너는... 나를 남자로 봐? 아니면 여자로 봐?

조지: 그냥 너로 봐. 그보다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봐?

메이: 그냥 나로 봐. 그런데 이건 좀 말이 안 되잖아. 별 뜻도 없는 것 같고.

조지: 왜, 그게 뜻이 있는 거지. 그게 '논바이너리'잖아. 구글에 한번 검색해봐.

메이: 어, 그래야겠다.

조지: 검색해보고 네가 알려주면 올바른 단어를 쓸게.


이어 둘은 포옹한다. 그 완벽한 포옹이 좋아서 한참을 그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대상을 보고서 거기에 내가 알고 있던 범주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아주 쉬울 것이다. 그 방법이 쉬우니까 사회는 계속 범주 안에 사람들을 넣고, 분류하고, 범주 바깥의 사람들은 배척했다. 경계선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해서 차별 받았다. 차별하는 사람들이 이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범주 바깥에 해당될 일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때로 묵인하고 때로 동조하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런 종류의 차별은 누군가를 결속시키는 데 쓰이기도 했고. 그리고 이렇게 차별하는 힘이 너무 커서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숨겼다. 이제. 숨었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나는 트랜스젠더다. 세상이 트랜스젠더를 괴물이라 할 때, ‘나도 괴물인가’ 하는 자기혐오를 이겨내고 나 스스로와 화해한 사람이다. 세상이 내게 쥐여 준 지루한 성별을 때려치운 사람이다. 내 생식기가 어떠하다고 내 행동이 제약되는 꼴을 견디기 싫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았고, 원하는 대로 몸에 칼을 댔고, 그전까지 내 몸을 죽도록 미워하던 것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빚어내고 강요하는 성별 양식이 얼마나 멍청한지 생각하고, 기만했고 가지고 놀았다. 남이 내 성별을 추측하지 못하도록 했다. 무엇을 하면 남자로 보이는지, 무엇을 하면 여자로 보이는지를 공부했고 실천했다. 성별을 둘러싼 금기가 얼마나 얄팍한지를 알았다. 여자가 다리털이 있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과 남자가 네일 아트를 받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소식지 <함께가는 여성> 2021 상반기호에 수록된 '쟁뉴'님의 글(https://www.womenlink.or.kr/archives/23656)에서 위의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너무 신이 났다. 나를 어떠한 범주에 넣기를 거부한 사람의 생생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한 양식을 마음껏 비웃는 사람의 용기와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한편 "여자가 다리털이 있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과 남자가 네일 아트를 받으면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런 목소리가 불편할 것이다. 이 목소리를 "틀렸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과 불화한 적 없는 사람들은 안전한 세상 안에서, 차별을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너는 너무 예민해" 같은 말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살아왔을 테니까. 차별주의자들이 그렇게 게으르게 있는 동안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길 택한 사람들은 이제 차별주의자들을 "기만"하고, "가지고 놀"고 있다. 정말이지 통쾌한 일이다.


나는 처음 본 강아지의 '종'이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차별하는 사람들과 먼 곳에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느낀다. 이른바 '품종견'이 어떤 환경에서 사육당하고 출산을 강요당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많은 강아지들이 버려지고 있는지, 한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모르고 - 혹은 알면서 - 그런 말을 하는 건 폭력적이라고밖에 여길 수 없다. 뭐, 궁금해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 궁금증을 입 밖에 내 아무렇지 않게 묻는 사람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사람들은 머지 않아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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