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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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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12. 2021

힘내, 후추

후추일기 열세 번째


밤 샜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은 "나 여기 있어", "힘내", 그리고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였다. 후추 중성화 수술 후 만 하루. 나도 후추도 기진맥진 상태다.


중성화 수술은 후추를 입양하는 조건 중 하나였다. 강아지 입양을 고민할 때, 중성화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해야 한다' 쪽으로 결심을 하고 있기도 했다. 강아지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추가 (추정)3개월 때 우리집에 왔고, 첫 생리를 시작하기 전에 수술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병원의 설명이 있었으니 6월 중에는 날짜를 잡아야 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망설여졌다. 당연히 해야지 생각했는데 어쨌든 '수술'이니까. 후추는 여자 아이라서 개복 수술을 해야 하고, 남자 아이들보다 회복도 더 느리다고 했다. 후추 괜찮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열광적으로 우드스틱을 씹고 있는 후추를 보면서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해야지. 당연히.


수술 예약 전날은 일찍 잤다. 나도 모르게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지 온종일 피곤했다. 침대에 눕자 후추는 영문도 모르고 곁에서 잘 잤다. 수술 당일 아침에는 당분간 편안히 산책을 못할 것 같아 일찍 일어나서 후추가 좋아하는 코스로 움직였다. 강아지 친구도 만났는데 어쩐 일인지 후추는 무서워하지도 않고(보통은 벌벌 떠는데) 잘 지나쳐갔다. 그 좋은 컨디션을 만들어 병원에 데려가는 것(후추는 멀미도 많이 하는데 병원 가는 길에는 멀미도 심하게 하지 않았다)이 못내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던 것 같다. 수술도 잘 받고, 집에 잘 오리라고.


딱 거기까지.

병원에 도착한 후추는 플라스틱 넥카라가 무서워서 착용하는 동안 똥을 지리고, 내 품에 안겨 있을 때도 발버둥을 쳤다. 내 팔은 엉망이 됐다. 아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후추를 수술실로 들여 보내고 빨갛게 부어오른 팔을 내려다 보고는 망연히 '이게 후추가 무서워한 흔적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수술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 사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그곳에서도 계속 '지금 후추는 어떨까', '별 일 없겠지',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만 들었다. 정말이지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수술실에서 나온, 아직 마취에서 덜 깨 내가 처음 보는 표정과 행동을 하고 있는 후추를 품에 안았을 때는. 결국 울고 말았다.


머리로는 울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도 솟아 나왔다. 하지만 그냥 눈물이 났다. 겁쟁이 후추가 몹시 힘들어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알고 있는 거랑 직접 겪는 건 정말 다르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집에만 가면 후추가 편안해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역시 큰 착각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후추가 가장 많이 지내고, 좋아하는 공간인 소파 위에 후추를 내려놓자 후추는 제게 느껴지는 낯선 아픔에 놀란 나머지 소파에서 뛰어내리더니 온 집안을 서툴게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뛰면 안 돼, 너 수술했단 말이야! 후추는 마취가 안 풀려 어색한 다리로 비틀비틀 뛰어 거실을 미끄러지면서 여기저기 쿵쿵 부딪혔다. 그러다 겨우 멈춘 곳이 식탁 옆. 나는 그대로 후추 옆에 엎드려 후추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나 여기 있어.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딱 미칠 노릇이었는데 그 말이 내게도 약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말이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후추의 고통을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게 그 순간처럼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후추는 평소에도 엄살 대마왕. 겁이 많아서 그럴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상상초월이었다. 다른 강아지들의 중성화 수술 후기를 찾아 보면 수술 후 내내 잠만 자서 걱정이라는 내용이 태반이던데 후추는 잠을 하나도 안 잤다. 아프다고 끙끙대면서, 잠깐씩 졸면서 끝까지 앉은 자세로 버텼다. 후추를 안아서 눕는 자세를 만들어주려고 해도 다리에 힘을 팍 주고 버텨 섰다. 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는, 처음 들어보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으면서 아픔을 겪고 있는 작은 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곁에 누웠다. 수술 후 8시간, 마취가 다 깰 때까지는 물도 주지 말라고 하기에 헥헥거리는 후추 곁을 그저 지킬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취가 풀려가는지 후추는 계속 울었다. 후추가 낑낑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일은 조금 더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미안한 동시에 이제 뭘 좀 먹일 수 있겠다 싶어 안심이 됐다. 8시간이 땡, 지나자마자 나는 밥 그릇을 만들어 대령했다. 수술 전에도 12시간 금식이었기 때문에 무척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텐데 후추는. 아니, 이 녀석 눈 앞에 놓인 밥 그릇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약간 패닉이 오려고 한다, 나는 물이라도 먹여야 한다는 일념에 물을 손가락에 찍어 입에 대줬다. 아휴, 그건 먹었다. 아파서 완전히 아기가 되어버린 강아지야. 밥 먹어야지. 멘탈은 계속 무너져가고 수술 첫날 밤을 이렇게 맞을 수는 없어 생각해낸 것이 황태국이었다. 황태를 물에 불리고, 물을 짜내고, 잘게 잘라서 물을 자작하게 넣어 끓이다 달걀을 하나 풀어 넣고 푹 익힌 황태국을 식혀서 ‘드렸다’. 결과는? 밥 그릇이 바닥에 놓여 있는데도 잘 드신다...


병원에서는 나쁜 습관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아픈 아기를 앞에 두고 그런 엄격한 마음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밤새도록, 그리고 지금까지도 후추는 눕지 않고 앉아서 졸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나도 같이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안절부절 못하다 다리를 벌벌 떨며 간신히 자기 방석에서 나온 후추는 그 맨 바닥에 그대로 오줌을 한바탕 싸고, 다시 자기 방석으로 들어가지 못해 내가 안아서 옮겨줬는데. 그렇게 고생하는 애한테 밥 안 먹는다고 5분 안에 밥그릇을 치우고(제한급식 훈련을 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한 끼를 거르게 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 후추 아픈 것 좀 다 나으면 그때부터 할게요...


후추 견생 최고의 힘든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힘내, 후추. 나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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