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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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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ug 28. 2021

이것도 지나고 나면

후추일기 스물네 번째


아득한 언젠가, 일본 여행을 한 일이 있다. 여행운 - 정확히는 여행지에서의 날씨운 - 이 좋지 못한 편이고, 애써 간 그 여행지에서도 내내 비가 내렸다. 특히 도착한 첫날, 비를 몰고 다니는 나를 실망시킬 수 없다는 듯 비는 바람을 품고서 사선으로 대차게 쏟아졌다. 몹시 서운하긴 했지만. 세워둔 계획이 있던 나와 남편은 비에도 지지 않고 숙소를 나섰다. 그 계획이라는 것이 맛집 탐방이었을 뿐이라는 점이 민망한데 그때 우리는 정말이지 어떤 비바람도 뚫고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여행이 그런 것 아니겠나. 문제는 계획이 좀처럼 달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아도 그곳에 있어야 할 목적지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말수는 급격히 줄어갔다.(내 머리 뒤로 먹구름이 고오오- 상승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계획을 세운 장본인은 그런 내 눈치를 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통하지 않는 말과 몸짓을 해가며 목적지를 찾느라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일부러 길을 못 찾은 것은 아닐 텐데. 하지만 그때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거의 울 것 같은 상태로 치닫는 중이었다. 계획을 세웠으면 목적지로 가는 길을 확실히 알아둬야지! 비까지 맞아가며 왔는데 언제까지 여기를 돌기만 해!! 길지도 않은 여행인데 웬 허송세월이야!!! 아으, 배고파!!!! 이런 생각으로 뒤죽박죽 된 속은 결국 계획한 곳을 포기하고 인근에 있던 다른 밥집을 찾아 들어가서야 정리가 됐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를 지금도 한다. 나의 더러웠던 성질머리에 대해서.


아닌 척 하지만 사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피고, 다독이고, 설득하지 않으면 금방 정신이 바사삭 흩어져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곤 하는 사람이다. 후추를 만나고도 그런 날이 많았다. 가장 심했을 때는 역시 후추의 중성화 수술. 고통스러워하는 후추를 돌보는 게 힘들었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물론 그 자체로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할 일이고 뭐고 그냥 후추 옆에서 같이 울어버리고만 싶은 나를, 그런 허약한 멘탈의 나를 어르고 달래느라 나는 진이 다 빠졌고, 얼마 뒤에는 결국 몸이 파업을 선언했다. 피부가 뒤집어져서 한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한 주문은 "차차 나아지겠지"였다. 정말로 이 옛날(사람이라 알고 있는, 무려 2003년의) 노래 가사를 눈으로는 울면서 주문처럼 흥얼거렸는데 그러면 좀 정신이 차려졌다. 그 말이 곁에 있어준 덕분에 "차차" 일상을 회복했다.


때로는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그 사건의 유형을 결정한다. 몇 가지 일들을 건너오면서, 특히 후추와 함께 살면서 나는 힘들고 어려웠던, 또는 그 순간에 화가 나서 못 견디게 싫었던 일들을 긍정하는 일, 그 일들을 일어날 필요가 있었던 일이라고 '유쾌하게' 해석해버리는 작업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동안 후추일기에 써온 얘기들이지만, 산책이 어려워서 주저 앉고 싶었던 날들과 후추를 두렵게 만드는 자동차와 자전거, 하다못해 나뭇가지까지 원망스럽고 속상했던 날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저기 후추가 밟기조차 무서워했던 방지턱을 의식도 하지 않고 지나갈 때,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벌벌 떨던 자전거를 무심하게 지나 보낼 때 나는 지금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감탄에 사로잡히곤 한다. 불과 몇 달 전에 경험한, 나로서는 여전히 생생한 어려움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가끔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자랑하고 싶어질 정도다. 그런 경험들 덕분에 펄럭이는 나뭇잎이나 깃발을 보고 후추가 등털을 오소소 세우면서 긴장할 때, 이제는 '이게 다 공부가 된다!'고 씩씩해지는 쪽을 택한다. 멘탈이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흔들리긴 흔들리지만...) 너 저거 몇 번 더 보면 신경도 안 쓰는 날이 곧 올 거야. 이게 다 경험이니까. 후추야, 우리 그냥 확 웃으면서 경험을 해버리자. 너 그거 할 수 있는 녀석이다. 이 말을 들으면 후추는 내게 얘기하겠지. 당신도 좀 잘해봐, 라고. 험험.  


그 일본 여행에서, 첫날의 위기를 극복한 우리는 남은 여행동안 무척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우리가 '일본'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역시 그날의 내가 부린 꼬장이다. 우리는 지금도 수년 전의 그 어리석은 불평쟁이를 놀리면서 웃는다. 그때 그 녀석에게 "님아, 화 작작 부려. 지금 그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거다."라고 얘기한대도 그 녀석은 안 믿겠지만. 아니, 믿지만 않으면 다행이게? 그 녀석은 틀림없이 화를 버럭버럭 내며 그 구역 최고의 밉상 자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안 좋은 기억을 내 삶의 좋은 일로 만들기, 나는 이제 할 수 있는 것 같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되니까.


얼마 전에는 좀처럼 해석이 안 되는 짜증 나는 일이 있어 친구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지나면 분명히 후회할 게 뻔한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면 짜증이 가시질 않아."라고 했더니 친구는 그 자신이 비슷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엄마가 들려주었다는 말을 내게 전해주었다.  


"'왜'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를 생각해."


이것만큼 현명한 말이 있을까.

내가 이 말을 더 일찍 알았다면 일본에서도 그토록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길을 못 찾는 거지? 대체 왜 우리가 이런 상황이 됐지? 이런 생각 말고 가려던 곳을 못 찾겠으니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 계획을 어떻게 바꿀까? 같은 생각을 했다면 훨씬 산뜻하게 이동했을 것이다.(물론 그러지 않아서 우리에게 생긴 웃긴 추억이 있다는 것도 좋다.) 아파서 밤새 잠을 자지 않는 후추 앞에서, 왜 이렇게 아파하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왜 수술을 했지? 까지 이르러서 쓸데없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눈 앞의 후추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할지를 생각했다면. 나는 조금 덜 울고 싶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지나면 추억이 되고, 나는 힘든 일을 추억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 것도 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내 멘탈, 많이 튼튼해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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