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괴물』, 『모두 깜언』
해가 바뀌었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 하고, 설날이 와 또다시 신년 인사를 하지만 진짜 새 출발이 어울리는 달은 3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름표 달고 입학식을 하던 시절부터 한 해의 시작은 늘 3월이었지요. 당장 해가 바뀌자마자 내달리지 않아도 돼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월은 당신, 괜찮아, 충분히 숨 고르기를 마친 후 움직여도 좋아, 라는 일종의 너그러움이 느껴지는 달이었습니다.
학교에 관한 한 추억 한 줄 없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학교 ‘문제’를 말하는 요즘에는, 학교 생활을 낭만적으로만 얘기하기에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개학이 달갑지 않은 대학생, 이른바 ‘취준생(취업준비생)’들에 관한 뉴스가 거의 매일 올라오기도 하고요. 이제 학교는 앎의 배움터로만 인식되는 곳은 아닌 형편인 게 확실합니다. 칸트가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던가요. 하물며 사람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은 어떻겠나, 생각합니다만 지금, 교육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 <세 얼간이>에서 주인공 란초는 교수에게 말합니다. “서커스 사자는 채찍의 두려움으로 의자에 앉는 걸 배우지만, 그런 사자를 잘 훈련됐다고 하지 잘 교육됐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번 곱씹어야 합니다. 대학간판이나 명함, 사는 곳과 입은 것 등 자본 논리로 삶이 판단되는 세상에서 자라는 지금 학생들은 묘기를 부리지 않으면 채찍질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벼랑 끝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고스란히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서커스 사자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번번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행복지수를 차지하는 한국 청소년들. 그들을 외면한 채 학교 교육의 위기를 말하고 ‘학교라는 괴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학교가, 교육이 그 자체만으로 고려 되어서는 않된다는 점입니다. 교육 문제는 각종 사회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특히 최근의 청소년 자살이나 지나친 사교육과 같은 문제들은 경제 불황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결코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심지어 이 불황은 잘못된 말이라고도 합니다. 이미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 우리가 취업 훈련의 장(場)으로써 학교를 이해하는 한 진짜 교육을 영원히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 education의 educate는 라틴어의 educar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educare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e와 ‘이끌어내다’는 의미의 ducare가 결합해 ‘밖으로 이끌어 내다’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요. 그런데 봅니다. 지금의 학교는 밖으로 이끌어 내기는커녕 주입시키고 강요하기 바쁘지 않나요. 쉼은 없습니다. 숨만 겨우 쉽니다. 위기의식과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생존해 있을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정말 묻고 싶어집니다. 진짜 배움이란 쉼에서 나오는 게 아니냐고. 멍 때리는 시간이야말로 당신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창조적’인 시간 아니겠느냐고.
20년 째 현직 교사로 근무하며 학교 문제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온 『학교라는 괴물』의 저자 권재원은 책에서 “교육이란 무엇보다도 교육받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그 행복은 미래에 유보된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순간에 주어져야 한다”(59쪽)고 말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저 당연한 말이 먼 나라 이야기로만, 황당한 소리로만 들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학자가 되고자 해도 수학을 못하면 좋은 대학의 역사학과에 진학할 수 없”(133쪽)는 지금과 같은 학교 현실에서 학생이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이 가능할까요?
또한 우리는 교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 “일반 민중들이 생소해 하고 어려워하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에 먼저 뛰어들어 연구하고 그 결과물들을 신참들에게 전해 주는”(111쪽) 지식 선도자의 역할을 한 것이 교사라면 지금은 “교사의 20퍼센트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채워 놓”(208쪽)은 채 말단 행정 공무원 노릇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형편이 아닙니까. 학생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을 어떤 교사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제 교사는 지식 전달에 앞서 학생 한 명, 한 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믿을 만한 어른으로 다시 자리해야 할 겁니다.
모두가 학교가 문제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라고 반문하면 입을 꾹 닫습니다. 선명한 대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는 어떤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가고 싶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서울 인근의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중학생 유정은 작은 아빠와 함께 거니는 밤 산책의 호젓함을 좋아합니다. 농작물이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하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작은 아빠의 가르침이 좋습니다. 유정은 이런 살아 있는 배움을 자신이 좋아하는 우주에게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방에는 밤 늦도록 불이 켜져 있을 것입니다. 산책할 시간도 없을 겁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작가 김중미의 소설 『모두 깜언』의 한 장면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봅니다. 유정이와 우주, 누가 더 많은 교육을 받았나요? 누가 진짜 교육을 받고 있나요?
저는 간절히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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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04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