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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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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an 29. 2022

그 자체로 완벽

후추일기 서른한 번째


후추를 보고 있으면 자연의 정교함에 넋을 놓고 감탄하게 된다. 우연의 필연성이랄까. 생명의 고유함이랄까. 도대체 어떤 유전자들이 모이고 모여서 후추라는 세상 하나뿐인 이 멋진 생명체를 만들어냈을지, 그 가늠할 길 없는 무한한 가능성들을 자꾸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또 털 얘기다. 머리에서 등, 엉덩이와 꼬리로 이어지는 후추의 몸 위쪽은 검은 털로 매끈하게 뒤덮혀 있다. 조명을 받으면 빤딱빤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빛이 반사될 정도로 윤기가 나는 멋진 털. 한편 턱에서 가슴, 배로 이어지는 몸 아래쪽은 흰 털이 보송하게 덮혀 있다. 햇빛 아래에서 보면 그 흰 털이 후추의 70%를 차지하는 검정색 털과 대비되어 후추의 우아함을 한껏 높여준다.(내 눈에만 그럴지도 몰라요. 하핫.) 그리고 옆구리를 비롯한 몸의 가운데쪽은 이 두 털의 색을 블렌딩이라도 하듯 갈색 털과 노란색(그보다는 아이보리에 가까울까?) 털이 섞여 있다. 그게 정말로 노련하게 완성된 채색처럼 경계 없는 그라데이션을 이룬 모습이라 볼 때마다 이 털 무늬의 형성 과정을 상상하고는 한다. 만약 후추를 만든 강아지 세상의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아주 절묘하게 색을 사용할 줄 아는 존재일 거라고 확신하면서. 그런 확신에 한몫을 하는 것이 후추의 가슴팍 털의 모양이다. 앞서 말했듯 다른 부분은 대부분 색의 경계가 없는데 가슴 부분만 마치 검정색 숄을 가슴 부분에서 묶은 것처럼 선명하게 브이(V) 모양이 새겨져 있다. 후추의 가슴털이 유독 하얘서 그 검정색 털의 브이가 더욱 잘 보인다. 후추를 만든 강아지 신의 미적 감각이 이렇게나 재미있다.

눈매 얘기도 해볼까. 후추의 눈꺼풀에는 솜씨 좋은 메이크업 전문가가 자연스럽게 그린 것처럼 진한 아이라인이 그려져있다. 특히 위쪽은 눈꺼풀 라인을 따라 눈동자보다 살짝 길게 뺀 천연 아이라인이 돋보인다. 자연은 강아지에게는 이런 아이라인을 주는구나, 엄청나다, 싶다. 뭐, 당연히 아이라인 따위 없어도 후추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후추는 쌍꺼풀이 없어도 아름답고, 몸통에 비해 얼굴이 커도 사랑스럽고(예방접종을 위해 찾았던 동물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얼굴 큰 강아지는 사랑이죠"라고 했었다. 물론입니다!), 다리가 짧아도 그 자체로 완벽하다.


후추만 그럴까. 모든 강아지들은 제각각 완벽하다. 저녁 산책에서 마주치곤 하는 '도비'는(도비 보호자 분이 워낙 간식이 후해서 후추도 몇 번 간식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도비는 침을 많이 흘리는 강아지인데 보호자 분은 손수건을 갖고 다니면서 침을 연신 닦아주며 다정히 산책한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완벽한 강아지.) 다리와 어깨가 두툼하고 얼굴이 크다. 짙은 갈색 털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 성격이 아주 태평해서 후추가 옆에서 긴장을 하든 까불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완벽하다! 뒷산 산책을 할 때 몇 번 마주친 이름 모를 강아지는 마치 사슴처럼 모든 곳이 가늘고 길다. 저 정도면 걷는 데 소리를 전혀 안 낼 수도 있을 것 같다.(그러고 보니 낙엽 밟는 소리가 안 들린 것 같기도 하고...?!) 그 우아한 강아지의 보호자 분이 한 말에 따르면 그 친구는 엄청나게 겁쟁이란다. 아니나 다를까, 오직 보호자 옆에 딱 붙어서 후추나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친다. 그 조각 같은 섬세한 외모와 걸음걸이라니. 역시 완벽해! 함께 일하는 동료의 강아지는 천사의 날개 같은 아름다운 꼬리를 갖고 있다. 산책하는 그 친구의 뒷모습을 영상으로나마 보고 있으면 마음에 한껏 평화가 찾아온다. '지상에 천사가 있다면 그것은 개'라고 한 어느 그림책 작가님의 말을 실감하게 하는 강아지다.(언젠가 꼭 후추와의 만남을 성사시키리...!) 정말이지 하나같이 완벽하다니까. 


그러니 생각하는 것이다. 강아지들은 완벽하고, 완벽한 것은 강아지들뿐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저마다의 고유함을 아름다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고등학생 때가 갑자기 생각난다. 내 방 책상 한구석에는 손바닥만 한 스탠드 거울이 놓여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보면서 '쌍꺼풀이 있었으면', '볼살이 없어졌으면', '속눈썹이 길었으면' 같은 되도 않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친구들은 물풀을 눈꺼풀에 붙여 억지로 쌍꺼풀을 만들어 다니기도 했고, 입술을 붉게 만들어주는 립틴트를 쉬는 시간마다 고쳐 바르기도 했다. 천성이 게을러 그런 것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심에는 내 외모에 대한 불만이 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나는 사람 역시 강아지처럼 생각하기로 한다. 어떤 사람은 키가 작고, 마음 그릇이 커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피부가 거칠고, 말이 다정해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다리가 두껍고, 멘탈이 튼튼해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눈썹이 옅고, 생각이 깊어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머리숱이 적고, 마음씀이 풍요로워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각졌고, 세상에 자주 경탄할 줄 알아서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엉덩이가 크고, 타인을 돕는 사람이라 완벽하게 아름답다...

나는 사람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끝도 없이 생각해낼 수 있다. 위의 문장들에서, 앞쪽에 놓인 외적 특징들은 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아무런 전제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당연하다. 한 사람은 한 세계, 하나의 우주이고 그 우주는 다른 우주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 타인을 외모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강아지들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저마다의 탁월한 자연의 이치로 태어났고, 그것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벽'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다.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결함이 없이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절반만 동의한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은 결함 없는 완전한 상태라기보다 결함을 포함하는, 결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내게 완벽은 살짝 찢어진 나비의 날개, 끝부분이 조금 꺾인 길고양이의 꼬리, 엄마 허리의 수술자국, 여름이면 점점 짙어지는 아빠의 피부색 같은 것이다. 이 완벽은 실수하는 완벽, 망설이고 주춤대는 완벽, 겁 먹고 그럼에도 용기내는 완벽, 상처 입고 그 상처를 자양분 삼아 더 강해지는 완벽이다. 

나는 모든 강아지들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완벽함을 가지고 이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 아래에서는 어떤 부족함도 사랑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완벽하다.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외모가 고민이라는 친한 어린이에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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