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후추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onSun Feb 11. 2022

나비처럼 어깨에 내려앉는 행복

후추일기 서른두 번째

책을 출간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접점이라곤 전혀 없는 분야의 사람들이 공통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어서다. 나는 그것을 '삶의 진실'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특히 가슴에 담고 있는 진실 중 하나는, '행복은 어떤 시절이라기보다 찰나에 가까운 것(그러니 행복의 순간을 잘 챙겨야 한다)'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내용을 다양한 언어로 변주하여 내게 들려주었다. 삶은 기본적으로 '행'보다는 '불행' 쪽에 더 많은 지분을 주고 있고, 행복이란 대단한 성취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드물게 찾아온 행복의 순간도 오래 가지는 않는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내게 찾아온 행복의 순간을 눈치 챌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순간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삶은 얼마나 귀한가, 그 순간을 알아차리면 삶을 조금 더 자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기록의 힘이다.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고 여겼어도 막상 꺼내려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소한 행복의 순간은 더욱 그렇다. 어떤 순간은 쌓이지 못한 눈처럼 사라진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후추일기를 쓰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 소중한 순간들을 더 선명하게 남기려는 몸부림이다. 나 외에 누군가가 읽어준다면, 공감해준다면, 우리의 춤을 기억해준다면 그것도 무척 소중한 일이겠지만 그보다 나에게 중요한 의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붙잡고 싶은 순간들을 외장하드에 보관하듯 적어둔다는 차원이다. 언젠가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꺼내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삶의 무기가 될 것이므로.


이제 설날도 일주일이나 지났고, 거부할 수 없이 2022년이다. 후추와 함께 한 지 한 달이 모자란 1년. 그동안 내게는 이런 행복이 있었다고, 나의 '나비처럼 어깨에 내려앉는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오늘 후추일기에는 상세히 기록해보고 싶다.


- 맑은 아침, 햇빛이 드는 자리를 귀신 같이 찾아 그 자리에 발라당 누워버리는 후추를 볼 때

- 후추가 쇼파의 등받이에 앞다리를 걸치고 기대 창밖을 구경할 때, 그 시간이 때로는 30분에 도달하기도 할 때

- 창밖에 나타난 고양이를 보고 함께 놀고 싶어 안달난 목소리로 낑낑대는 후추

- 후추의 젖은 코가 다녀간 자리에 남는 촉촉한 물기들

- "나갈까?"(정확히는 다른 표현이다)라고 하면 그 말을 알아듣고 방방 뛰는 후추

- 등을 한 번 쭉 쓰다듬으면 뒷다리를 쫙 벌려서 배를 쓰다듬으라고 요구하는 후추

- 우리만의 비밀 공간에서 목줄 없이 마음껏 내달리는 후추의 얼굴을 볼 때, 그런 후추가 신나게 달려와 내게 몸을 내던지듯 안기는 것

- 잠을 자면서 발을 구르는 것을 볼 때

- 간식을 기다리며 후추가 눈을 반짝반짝 빛낼 때, 곧이어 간식을 확보하자 한순간에 달라지는 욕망 어린 후추의 눈빛

- 소복이 쌓인 눈 위를 방방 뛰는 후추, 그리고 쌓인 눈을 마치 빙수처럼 즐기는 후추, 그러느라 입가에 잔뜩 눈을 묻힌 후추, 그런 후추의 (눈이 녹기 전)얼굴

- 졸려 죽겠지만 억지로 졸음을 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하나도 안 졸린 척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을 하는 후추

- 자다가 난데없이 후추 뒷발에 얼굴을 얻어 맞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깼는데 천연덕스럽게 계속 자고 있는 후추의 잠든 모습을 볼 때

- 후추가 자기 방귀소리에 깜짝 놀라 엉덩이 쪽을 획 돌아볼 때

-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 내게 놀자며 최애 인형을 입에 물고 총총총 걸어오는 후추, 그래도 안 놀아주면 금방 포기하고 최애 자리로 가서 인형을 물어 뜯는 후추

- 아무리 뛰고 놀다가도 자기 인형의 뜯긴 부분을 바느질 하려고 앉으면 바로 곁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 후추, 그러다 꾸벅꾸벅 조는 후추

- 머리를 만져주자 내 손바닥에 무게중심을 확 옮겨버리는 후추

- 카페트 위에서는 신나게 움직이다가 거실 맨마룻바닥으로 내려서면서는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걸음을 한껏 조심하는 후추

- 아파트 방송이 나오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할 때

- 잠자리가 아무리 넓어도 굳이 다가와 내 몸에 바싹 몸을 붙이고 잠을 청하려 할 때

- 몸을 완전히 뒤집고(배를 까고) 숙면을 취하는 후추를  

- 네 개나 발견해서 찍어둔 후추의 빠진 유치 사진을 비롯한 모든 후추 사진들


적다보니 끝이 없다. 얼마든지 더 적을 수 있을 것만 같고, 우리에게 시간이 쌓일수록 목록은 계속 늘어나겠지만 여기서 줄인다. 후추가 놀자고 하니까.(찡긋) 부디 후추와 나 사이에 남은 날들이 이런 멋진 순간들로 더 많이, 자주 채워지기를. 새해를 맞은 나의 진짜 소원은 그보다 더한 것도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자체로 완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