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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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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pr 11. 2021

안녕하세요, 라는 말

후추일기 두 번째


한 동네에서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심지어)대학교까지 다녔다.

아주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겪은 셈이다. 그러다 7년 전 완전히 새로운 동네에 거주하게 됐을 때 나는 꽤 기뻤다. 잠시 편의점을 가다가도 학교 친구나 동생 친구, 친구 엄마나 엄마 친구를 마주치게 되는 좁은 동네를 벗어난 데서 아주 큰 해방감을 느꼈다. 이사한 동네는 내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 완전한 익명 안에 숨어서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막 입주를 한 사람들이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정보를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중에도 절대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 이 동네도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지내는 거야. 혼자가 좋다. 혼자이고 싶어. 그 로망을 서른 넘어 실현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가족과 나만 그렇게 조용히 지내며, 아주 편했다.


이제 나는 동네에서 후추랑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인사를 건넨다.


후추가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용감한 겁쟁이 후추는 여전히 만나는 모든 세상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품고 다가간다. 우리집에 와 함께 산 지 2주 남짓. 후추는 아직도 산책길에서 제가 밟은 낙엽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후추와 나를 연결하는 줄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라도 걸린다 치면 나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아휴, 누가 보면 내가 너를 괴롭히는 줄 알겠다, 후추야. 그럴 때마다 땀이 삐질삐질 난다. 그렇지만 내가 당황하면 후추도 알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포커페이스를 하고, 괜히 소리 내어 웃기도 하면서 "후추 괜찮아, 가자!" 하고 후추를 달랜다. 후추의 회복은 나보다 훨씬 빠르다. 개의 충격적인 건강함에 매일 감탄한다. 후추는 방금 내지른 비명은 완전히 잊고 다시 길을 걸으며 풀 냄새를 맡는다. 야, 방금 그거 벌써 잊어버렸냐? 상처 내가 받았어...


산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후추는 옷감이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를 싫어한다. 특히 등산복이나 패딩의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걷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벌써 몸을 벌벌 떨면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 당연하게도 너무 겁이 나면 간식이고 뭐고 없다. 의지하는 건 내 손길뿐. 나는 후추 옆에 같이 앉아서 "괜찮아, 괜찮아, 후추 잘 하네. 그래, 괜찮아."를 주문처럼 외운다.

그날도 나와 후추는 길 한 구석에 주저 앉아서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이 모든 싫은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다정한 중년의 여성 분이 다가왔다.


"아이고, 너 완전 애기구나!"

"네, 이제 4개월 되어 가요. 너무 겁이 많네요."

"하하, 괜찮아요. 우리 애는 10살 됐는데 처음에는 산책 나와서 꼼짝도 못했어요."

"아! 그래요? 지나면 좀 괜찮아지나요?"

"그럼요! 지금은 산책이라면 환장을 해요. 너도 점점 더 재미있어질 거야. 산책 재미있게 해, 안녕!"


 친절함에 눈물이  만큼 안심이 됐다. 초보 반려인인 나로서는 앞으로 영영 산책길을 이렇게 다녀야 하는 아닐까 싶어 패닉에 빠지려던 참이었다. 그래, 나아진다. 이것도 나중에 웃으면서 얘기하게  거야. 뜻밖에도 후추는 내가 낯선 사람과 호감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안심을   같았다. 말려 들어갔던 꼬리가 다시 편하게 움직였다. 후추의 안심한 모습에 나도 덩달아 용기가 나서 "가볼까?" 했더니  까만 눈을   맞춰주고는 앞서 걸었다.


그때 알았다. 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과 친근한 인사를 나누는 일이 얼마나 후추를 편안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은 후추뿐 아니라 나를 바꾸어 놓았다.


며칠 뒤의 일이다. 벚꽃이 예쁘게 피어 있던 날에, 벚나무 아래 풀숲에서 바쁘게 냄새 맡고 있는 후추를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분은 곧 휴대전화를 꺼내들더니 후추 사진을 찍는 게 아닌가. 겁 많은 후추가 낯선 사람의 접근을 알아채고 놀랄까 긴장이 됐던 나는 할아버지를 향해 "얘가 겁이 많아요"라고 서둘러 말했다. 할아버지는 내 말에 대답도 않고 계속 후추만 찍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기에 다시 한 번 "너무 겁쟁이에요"라고 했다. 여전히 무반응. 좀 짜증이 나려던 참인데 할아버지의 친구(로 보이는 또 다른 할아버지)가 저기서 다가왔다.


"무슨 강아지를 찍어? 꽃이 이렇게 좋은데 꽃이나 찍지 않고."

"꽃은 뭐. 강아지 봐라, 예쁘잖아."


그러고는 뒤돌아 갔다.

도치맘인 나는 그 말에 벚꽃처럼 마음이 환해져서 "고맙습니다!"라고 뒤통수에 대고 인사했다. 그 인사에 할아버지도 (드디어)"네에-"라고 답했다.


후추 덕분에 산책 나온 보호자와 어린이, 하교하는 학생들, 햇빛 샤워 중인 할머니들과 생전 말 한 번 섞을 일 없다고 여겼던 중년 남성과도 인사를 나눴다. 내가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면 후추도 편안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밝히자면, 후추를 위해서 시작한 인사하기는 이제 나를 위해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반드시 비슷한 온도의 인사가 돌아온다. "후추, 언니한테 안녕하세요, 해."라고 하면 지나가던 언니도 "안녕!" 해준다. 후추는 그렇게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 틈에서 성장한다. 후추의 성장이 나는 너무나 좋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나 역시 이 동네에 조금 더 뿌리 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나의 성장.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당장 떠나버려도 미련 없다고 생각한 이 동네가 조금씩 예뻐보이고, 더 좋아지는 것이다. 이 동네가 후추에게 더 친절한 곳이었으면 싶고, 우리의 인사가 실제로 그런 곳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큰 꿈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냥 인사일 뿐인데. 정말 그렇게 된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예쁜 말인지. 이 말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얼마나 부드럽게 만들어주는지. 후추 덕분에 이제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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