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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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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pr 16. 2021

함께 추는 춤

후추일기 세 번째


후추가 집에 오기 전에 상상한 모습은 이랬다.


매일 함께 산책을 하겠지. 그렇다면 날씨의 변화도, 계절의 변화도 만끽할 수 있겠다. 통 집에만 있었는데. 덕분에 운동도 좀 하자. 나는 원래 구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햇볕 좋은 날 함께 나가서 구름 구경을 할 수 있다면. 후추가 봄에 와서 정말 잘 됐다. 같이 벚꽃길을 한가롭게 걷고 싶어. 산책할 때 귀여운 사진 많이 찍어서 동네방네 자랑해야지. 강아지가 환하게 웃는 그 환상적인 사진 나도 많이 찍을 수 있으면 좋겠네. 공원도 많이 가고, 친구네 강아지도 자주 만나자.


후추가 우리집에 온 지 3주째. 현실은 이렇다.


산책은 나가기 30분 전부터 눈치 게임 시작이다. 하루에 몇 번이라도, 후추가 원한다면 언제든 산책을 나갈 의향이 있었던 나의 상상 속에서는 "후추, 산책 갈까?" 한 마디면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와 산뜻하게 나갔는데. 아직 사람의 손길이 편안하지 않은 어린 강아지 후추는 제가 먼저 다가와 손에 코를 대고 킁킁대면서도 그 손의 움직임이 살짝만 보이면 몸을 뒤로 싹 뺀다. 어쩜. 그렇게 재빠를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어진 나는 너의 행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딴짓을 한다. 밀당후추 선생님께서는 슬쩍 또 다가와 관심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래, 밀당 한 번 해보자. 나는 살짝만 관심을 주면서 후추를 안달나게 한다. 그러면 얘는 손이 조금 움직여도 곁에 있는다. 처음 몇 번은 이때 방심해서 다시 후추를 도망치게 했지만 그런 실수를 또 할 순 없지. 이제 나는 후추의 두툼한 앞발을 손등으로 살살 쓰다듬는다. 작은 손길을 즐기는 후추. 손길이 닿는 영역을 살살 넓히다가 방심한 녀석을 사라락 들어 안으면! 산책 절반은 성공이다.(안타깝지만 이 과정은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해야만 한다.) 다행히 일단 품에 안기면 후추는 크게 반항하지 않은(또는 못한) 채 목줄 채우는 것을 체념한 듯 허락한다.


앞 일기들에서 겁쟁이 후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후추에게 즐거움이자 공포는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것들뿐 아니라 내가 붙잡고 있는 줄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줄이 조금만 팽팽해지면 후추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잘 따라오는 것 같아 앞서 걷다가 후추가 동네방네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 적도 있고, 달리는 게 즐거워 보여 함께 달리다가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려고 속도를 줄이자 또 후추가 동네방네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 적도 있다.


지금 산책에서 나의 목표는 오로지 줄의 느슨함을 유지하는 것. 얘는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다가도 갑자기 나타난 벌이나 새를 따라 확 달려나갈 때가 있기 때문에 주시하고 있다가 그런 순간 줄이 너무 당겨지지 않게 함께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으려 애써야 하고, 마주오는 사람이나 강아지도 (눈의 흰자까지 총동원해)살펴야 한다. 그밖에도 신경쓸 일은 너무나 많아서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오직 내 왼쪽에서 걷는 후추만 바라본다. 날씨의 변화? 계절의 변화? 아. 잘 모르겠다.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걷다가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 그보다는 풀숲에 놀랍도록 똥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정말 비매너다. 반려인들 욕 먹이는 짓이에요. 제발 배변봉투 챙깁시다, 여러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산책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 역시 마음껏은 하지 못한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들다가 산책 박자가 흐트러지면 줄이 홱 당겨질지도 모르니까. 사진 없이 후추의 귀여운 모습을 내 머릿속에만 담아 두고 있다. 으으, 아쉬워.


후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고 산책을 즐길 수만 있다면. 지금은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며칠 , 처음으로 후추가 비명 소리를  번도 내지 않고 산책을 마쳤다. 집에 도착해 나는 안도의 한숨부터 쉬었다. 고마워, 후추. 후추도 상쾌한 모습이었다. (후추 나와바리) 들어와 활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쉬고 있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산책 내내 그저 후추의 움직임에 맞추느라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앉아  생각은 후추도 나의 리듬에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어떤 놀라운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후추는 훨씬 빨리 달릴  있는데  보폭에 맞춰 걸었다. 줄이 당겨지는  싫기도 하겠지만 나랑 나란히 걷는 것도 즐거워 보였다. 벌이, 새가, 고양이의  냄새가 너무나 궁금하고  다가가고 싶지만 함께 걷고 있는 덩치  인간이 신경 쓰여서 호흡을 맞춰주는 것이다.


그렇구나, 오, 이건 마치 함께 추는 춤 같다.


둘이 호흡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순간에 하늘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구나. 함께 춤을 추는데 내가 갑자기 카메라를 꺼내서 상대가 춤 추는 모습을 찍겠다고 율동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구나. 만약 각자가 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은 만큼 했다면 우리의 춤은 엉망진창이 됐겠구나. 나는 후추 너와의 산책이라는 것을 1도 이해하지 못했던 거구나. 내 상상은 잘못된 것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의 '환상'은 그보다 더 환상적인 '현실'로 대체되었다. 후추가 좋아하는 꽃이나 나뭇가지의 종류, 후추가 어제는 두려워했지만 오늘은 덜 두려워하는 소리들, 이제는 용감하게 건너 뛰는 방지턱들, 씩씩하게 걷다가 문득 문득 나를 올려다 보는 눈빛 같은 것으로.


요즘 나는 후추와 산책을 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매일 새롭게 알아채고 있다. 후추의 산책 중 웃는 사진이나 나 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평화로운 산책 리듬의 순간은 아직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다. 지금 네가 알려주고 있는 이 세상이 나는 너무 좋아. 후추야. 오늘 춘 우리의 어설픈 춤을 기억하자. 우리 더 멋진 춤을 추자. 마음껏 춤을 추면서 멀리 멀리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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