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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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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an 14. 2022

80%만 하자

후추일기 서른 번째


순도 98%의 진심이지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 에너지의 80%만 써서 일하자"라는 말이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올해로 8년 차. 때로는 113%로, 때로는 68%로 일해본 경험에 기반해 이렇게 결론 내렸다. 사실 68%로 일한 경험은 몹시 드물다. 내가 어찌나 자기 효능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50%만 에너지를 들여 일해도 될 일까지 번번이 104% 정도로 일하곤 했다. 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일을 잘하고 싶었다. 외적, 내적 요인이 뒤섞여 종종 자발적으로 일에 나를 '갈아넣었다.' 나는 내가 직장 생활을 약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바로 이 적정 에너지 조절 실패라는 요인이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놓고는 프리랜서로 일의 형태를 바꾼 뒤에도 금방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일 열심히 하는 나'가 주는 고양감은 쉽게 중독되는 감정이다. 내가 아니면 절대 안 될 것처럼 일하고서 그렇게 무리해서 나온 결과물을 나의 평균치 능력이라고, 완전히 잘못된 평가를 내렸다. 자신의 한계를 간과한 중독자의 무모함이 아닐 수 없다. 그 끝에는 뭐가 남나. 거기에는 눈부신 명예도, 뛰어난 성취도 없다. 그저 번아웃뿐. 일을 잘하고 싶어 한 노릇이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는 노릇이 되면 어쩌라는 것일까요. 나는 내 에너지의 80%만 일하기로 다짐한 뒤에 더 만족스러운 일의 결과를 얻었다. 이미 80%만 하기로 마음 먹는 동시에 일에 대한 압박감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일에 부담을 덜 느끼기만 해도 일이 훨씬 잘 된다는 것은 그렇게 얻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니 어떤 결과물이 나와도(그 결과물이 내 능력치의 78%짜리건 103%짜리건 간에) 지치지 않고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특히 프리랜서에게 중요한 것이 마감이다. 일단 마감까지 열심히 한다. 마감일이 닥치면, 그 결과물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아도 놓아준다. 그래야 지속할 수 있다. 결국 나의 일은 가장 완벽한 결과물을 내는 예술가의 일이 아니라 마감 안에 최선의 결과물을 내는 노동자의 일이라는 점. 지금 나는 이 점을 단단히 기억하려 애쓴다.


내 한계보다 더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실제로 나를 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한계를 아는 것,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나와 오래 잘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나저나 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후추의 반려가족으로 사는 데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또!)뒤늦게 깨닫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장면에서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직 졸린 눈으로 후추와 나란히 앉아 나는 한 손에 든 털빗으로 후추의 등을 빗는다. 그 노곤한 감각이 만족스러운지 눈을 껌벅거리는 후추를 보는 건 언제나 행복하다. 아니, 그런데 털이... 털이 계속 빠진다. 이 털은 언제까지 빠지는가. 한 번 더, 다시 한 번만 더. 나는 '한 번 더'를 몇 번이나 셈하다가 물러선다. 털이 빠지지 않는 빗질이란, 0에 수렴은 하겠지만 영원히 0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내 뒷덜미를 잡아채면서. 집안 곳곳에서 존재감을 빛내는 후추의 털도 마찬가지다. 일명 '털 공장장' 후추의 가시는 걸음걸음은 언제나 흩날리는 털로 가득하다. 나는 그 흔적을 살피며 할머니처럼 쭈그려 앉아 손으로 쓸기도 하고, 돌돌이를 몇 번씩 돌리기도 하고, 청소기도 수시로 돌리...다가 결국 무릎이 나갔다. 내 무릎의 한계를 무릎이라는 분이 나가셔야만 알아차리는 미련한 나. 후추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뒷산을 뛰어서 오르고 내린 것도 무릎 가출에 한몫했다. 산에 오를 때는 미처 몰랐던 시린 통증이 하산할 때면 반드시 찾아왔던 것이다. 눈물 어린 눈으로 '무릎 보호대'를 검색하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리고 말았다. "여기까지만 하자..."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일은 150% 최선을 다 한다. 그러고 싶은 일, 그럴 수 있는 일은 그렇게 한다. 후추와 집에서 하는 인형 던지기 놀이는 하루 백 번도 더 할 수 있다.(최근 마음 먹고 세어봤더니 정말로 저런 숫자가 나왔다) 어차피 후추는 체력이 (나를 닮아)저질이라 제가 먼저 놀이를 끝내곤 한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그 시간은 내게 최우선이다. 그게 후추를 향한 내 사랑이고. 

일 역시 그렇다. 150% 최선을 다해봤자 92% 정도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어떤 일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 또 있다. 그래도 거기에 중독되지는 않게 조심조심... 2가 세 개나 있는 낯선 해, 2022년도 그렇게 살살 나를 달래가며 한계까지는 다다르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갔으면. 그게 요즘 가장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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