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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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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pr 21. 2021

완벽할 수는 없지

후추일기 네 번째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나를 둘러싼 대략의 것들이 익숙해진 30대 후반.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싶은 것들 앞에서 자만했나보다. 후추는 '도저히 모르겠다' 싶은 미지의 세계다. 분명히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번번이 상상을 초월한다. 후추라는 세계 앞에서 나는 매일 벌벌 떨고 있다. 아닌 척 했지만 사실은 후추보다 내가 더 겁쟁이인 것이다. 후추의 용기를 발끝도 못 따라가고 있는. 


후추가 오고 처음으로 혼자 후추를 온전히 보던 날은 정말로 무서웠다. 문자 그대로 1분 1초가 긴장되고 신경이 곤두섰다. 얘가 자면 자는 대로 '내가 너무 안 놀아줘서 우울한 건 아닐까', 놀면 노는 대로 '산책을 나가야 하는데 집에만 있어서 불안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밥을 안 먹으면 안 먹는 대로 '아직도 집에서 안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앉아'나 '기다려' 같은 훈련이 잘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러다 영영 문제 강아지가 되면 나는 어쩌지' 같은 생각에 울고 싶어졌다. 


과도한 정보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아지랑 잘 살고 싶어서 공부를 너무 많이 했다. 문제 강아지들이 등장하는 TV프로그램을 챙겨 보던 나로서는 후추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를 죄다 문제 행동으로 느꼈다. 대범하게, 침착하게. 계속 되뇌던 말이지만 대범의 ㄷ자도 내 안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후추와 단 둘이 보낸 첫 날의 기억이 지금은 좀 없다. 그만큼 혼란과 공포로 (조금도 대범하지 못하게)시간을 견뎠다. 


후추를 혼자 보던 세 번째 날. 일이 터졌다. 후추를 임시 보호 했던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후추의 엄마와 후추의 형제가 심장사상충 양성 판정을 받았으니 후추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완전히 혼이 나갔다. '심장사상충'을 검색하면 나오는 증상들이 모두 후추의 것으로 의심이 됐다. 왠지 기운이 없었던 것 같아. 왠지 식욕이 좀 떨어졌던 것 같아. 

당장 후추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당장 집을 나서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던 것은 공부만 많이 한 초보 반려인(나) 때문이다. 이 터무니없이 소심한 인간(나)은 이 와중에 강아지를 억지로 번쩍 들어 안는다거나 강제로 이동 가방에 넣는 게 나쁜 기억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 후에 문제 행동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아직 나도 낯설어 하는 후추가 알아서 가방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 당연한 일이 그 순간에는 어째서 조금도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저 '망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려 한 시간 동안 후추한테 사료를 한 알씩 주면서 이동 가방에 스스로 들어가는 훈련을 했다. 이 퀘스트를 넘어야 병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러는 동안 온갖 유튜브를 다 찾아보면서, 계속 시도했다. 후추는 이동 가방은 싫지만 사료는 열심히 먹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한계에 다다른 나는 거의 울면서 임시 보호를 해주셨던 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후추를 한 시간 동안 간식으로 꼬셔서 가방에 들여보내려고 하는데 죽어도 안 들어가요 ㅜㅜ 어쩌죠 보호자 님은 어찌 하셨나요 ㅜㅜ 울고 싶은 마음으로 톡 드려요 계속 연락드려 죄송해요 ㅜㅜ 혹시 후추 안아서 가방에 넣으면 너무 안 좋은 기억이 심어질까요??!;;;; 마음은 급한데 온갖 생각이 다 들어서 이렇게 혼돈의 톡을 드려요 ㅜㅜ '


돌아온 대답은. 

'안아서 넣는다.'

맙소사. 


걱정 부자. 쓸데 없는 부분에서 완벽주의자. 어리석은 인간. 나는 나를 심하게 탓하며, 역시 한 시간 동안 나와 씨름하느라 지친 후추를 안아 가방에 넣었다(오, 얌전히 들어간다). 다행히 친절한 택시 기사님을 만나 안전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 멀미 하는 강아지 후추는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가면서도, 진료를 받으면서도 침을 잔뜩 흘리며(내 옷 앞섶이 완전히 젖어버렸다) 겁에 떨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결국 가방에 들어가는 훈련을 하느라 잔뜩 먹은 그 사료를 다 토했다. 가방 안에서 토 범벅이 된 후추를 데리고 겨우 집에 들어왔을 때.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리에 묻은 자기의 토를 핥아 먹고 있는 후추를 말릴 힘도 없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이런 거였구나'만 생각했다. 


다행히 심장사상충은 음성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된 거야. 느지막히 정신을 겨우 차리고 일어나 평소였다면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컵라면을 끓여 허기를 채웠다. 오후 5시에 먹는 첫 끼였다.(후추가 온 지 일주일 만에 1.5kg이 그냥 빠져버린 기적...) 


며칠 뒤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친구는 2살 터울의 남자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나의 고민들과 심장사상충 사건을 하소연했더니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낮 동안에 아이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게 미안해서 잠 잘 때만큼은 꼭 내가 재우려고 했거든. 회식을 해도 어떻게든 애들 자는 시간에는 집에 들어갔어. 그랬더니 지금 어떤 줄 알아? 애들이 유치원에서 낮잠을 못 자. 엄마가 없으니까. 나 아는 사람은 아이랑 하루 종일 너무 잘 놀아줬대. 그랬더니 아이가 유치원엘 안 가려고 한댄다. 엄마가 제일 재미있으니까. 정답이 어디 있어. 뭘 해도 다 내 잘못 같고 그런 거지. 그래도 좀 여유를 가져. 나도 첫째 때는 못했는데 둘째 때는 좀 여유가 생기더라. 좋으려고 데려온 강아지잖아. 그렇게 힘들이면 금방 지쳐, 너." 


너무 맞는 말이었다. 세상에, 육아/반려에 정답이 있다면 다들 그대로 하면서 문제 없이 살았겠지. 저기서 정답이라고 하는 것도 나한테 안 맞는 게 얼마나 많아. 그런데 어째서 후추한테는 그렇게 지침을 많이 뒀던 거냐. 후추야, 겁쟁이는 다름 아닌 나였네. 미안하다. 


후추는 저기 가고 있는데 나만 여기에 있다. 후추가 두려움에 맞서고 성장하는 만큼 나도 성장하기를 요즘은 많이 빈다. 우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실수라는 걸 겁이 날 때마다 떠올려야지. 어떻게 삶이 완벽하겠어. 완벽할 수는 없지. 그냥 우당탕탕 해나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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