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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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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l 11. 2021

여름의 일

후추일기 열여덟 번째


동료가 감자를 한가득 선물로 주었다. 부모님께서 수확하신 (무려 무농약)햇감자라고 했다. 여름의 감자! 감사히 받아 들고 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자를 깨끗이 씻어 냄비에 넣었다. 폴폴폴 삶은 감자를 꺼내, 식기 전에 후후 불어서 껍질을 깠다. 말끔하게 까지는 껍질에 집중하며 그 중 작은 알감자 하나를 후추의 몫으로 떼어두었다. 그것을 후추 그릇에다 손으로,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으깨면서 입김으로 식히는 동안 후추는 그것이 제 것이라는 걸 아는 듯 발 밑에서 폴짝 폴짝 뛰었다. "알았어, 알았어. 자, 후추, 먹어." 적당히 식은 감자를 후추 앞에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 손에 묻은 감자를 씻어내고 나왔다. 이것은 어쩌면 후추 견생 첫 감자. 얼른 먹는 사진 찍어야지, 했는데. 돌아오니 후추의 그릇은 처음부터 감자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으, 한 발 늦었네.

아쉬우면서도 와하학, 웃음이 터져서 내 몫의 감자를 조금 더 으깨주고(그래도 결국은 사진은 못 찍고) 생각했다. 너의 첫 감자 어땠니, 하고. 이번이 너의 첫 여름이구나, 하고.


조용한 동네에 살아서 좋은 점은 계절의 변화를 소리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은 밤이면 온갖 풀벌레와 개구리 혹은 두꺼비의 열렬한 울음소리가 쏟아진다. 츠츠츠츠츠. 짜르짜르짜르. 쓰쓰쓰쓰쓰. 꽈꽈, 꽈꽈. 맹렬하다고 할까, 그 뜨거우면서도 평화로운 소리들. 엄청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녹음기에도 담기지 않는(시도해보았지만 실패.), 귀한 소리들이다. 며칠 전에는 이 소리를 들으며 "진짜 여름이구나" 했다.

아침이 오면, 밤에 뚝 그쳤던 새소리들이 풀벌레 소리를 몰아내듯 밀려온다.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뻐꾸기, 까치, 딱따구리 소리뿐이라 아쉽지만. 이름 모를 다양한 새소리들이 그야말로 머리 위에 쏟아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여름의 냄새는 얼마나 짙은지. 후추는 창문 앞에 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여름의 냄새를 먹는 것처럼 맡고 있다. 잠이 조금 가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후추, 산책가자!"


사실 내게는 여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 생활 내내 '해비타트'라는 단체를 통해 집짓기 봉사활동을 했었다. 일명 '번개건축'이라는 이 프로그램은 주로 8월 초, 한여름 일주일 동안 대규모의 봉사자들이 집짓기에 투입되어 번개처럼 집짓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었다. 나는 춘천으로, 태백으로, 천안으로 매해 여름마다 집짓기를 하러 다녔다. 8월의 태양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땀을 줄줄 쏟아내며 망치질을 하고, 무거운 건축 자재들을 옮기던 날들이 그대로 나의 여름이었다. 15년도 지나버린 이야기지만 나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서면 어김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곤 했다.


이제 나의 여름은 새로 쓰이고 있다. 후추와 산책을 다니면서 잊고 있던 여름의 기운을 몸에 새기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부터는 여름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시원한 곳을 찾아 숨어들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서 몸의 열기를 빼는 데만 몰두했었다. ‘어떻게든 더위를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꾸준히 없애왔던 셈인데 후추는 그런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 나는 후추와 함께 더위 속으로, 태양 속으로, 그러니까 여름 속으로 나가야 한다. 재미있게도, 그게 또 상쾌하다. 씩씩하게 걷다 보면 땀이 퐁퐁 솟고 숨이 차오른다. 그러면서 몸을 활발하게 움직일 때만 알게 되는 생기를 느낀다. 어쩌면 그 생기는 20대에만 있었던 것이라고 착각하고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후추 덕분에 되찾은 나의 여름.


여름 꽃들이 얼마나 선명한 색을 하는지, 나무들이 여름에 얼마나 기세가 좋아지는지, 풀들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 산책길에서 확인한다. 풀이 후추 키높이로 자라버려서 더 이상 배변하지 못하던 풀숲 자리가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기에 반가워했더니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가 다시 풀로 가득해서 깜짝 놀란 기억. 비 온 뒤에 지상으로 올라와 있는 지렁이들을 얼마나 많이 마주치는지. 얼마 전에는 두꺼비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길가에 앉아 있어서 후추와 함께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 두꺼비 역시 후추 견생 첫 두꺼비겠지? 호기심 천국인 후추가 자꾸 다가가려는 걸 만류하고 돌아오면서 여름이 얼마나 재미있는 계절인지를 곱씹어보았다. 여름이야말로 생명력을 실감하게 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안타까운 얘기지만 한편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비가 오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온다. 후추와는 비와 술래 잡기를 하듯 잠시 비가 그치면 후다닥 산책을 나갔다가 들어오고, 그렇게 하루에 해야 할 몇 번의 산책을 성공하면 퀘스트를 통과한 듯 재미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 비의 이유를 생각하면 운동화 속에서 빠지지 않고 있는 작은 돌맹이를 끊임없이 느끼며 살아가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캐나다와 미국에 왔다는 유례없는 폭염 소식을 보며 이 여름을, 이 더위를 낭만적으로만 여길 수는 없으니까.


후추의 첫 번째 여름.

나는 후추의 두 번째 여름도, 세 번째 여름도 그저 생명력을 만끽하며 기쁘게 산책하는 것이기를 바란다. 연일 계속되는 비로 산책을 미뤄야만 하는 일이 너무 많지는 않기를. 너무 뜨거워져서 여름의 생명력이 상해버리지는 않기를. 다른 생명들이 모두 제 생태에 맞는 계절을 맞이해서 딱 그만큼의 건강함을 품고, 그것을 산책할 때마다 마주할 수 있기를. 후추가 평생 살 여름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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