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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후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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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Apr 26. 2021

네 꿈이 좋은 것이기를

후추일기 다섯 번째


강아지는 낮잠을 이렇게나 많이 자는구나.

매일 감탄하고 있다. 분명히 밤새 푹 잔 것 같은데 아침에 일어나면 한 시간 잠깐 놀고 또 잔다. 조금 잔다 싶으면 깨서 먹고, 싸고, 놀고, 다시 잔다. 지난 일기에 쓴 것처럼, 후추랑 단둘이 보낸 첫날은 얘가 너무 많이 자는 게 걱정이었는데. 함께 지내보니 원래 많이 자는 거였다. 어린 강아지라 더 그런 거겠지만. 심지어 주말 동안 부산스러운 두 명의 덩치 큰 인간들 때문에 자꾸 깨서 잠이 부족했다 싶으면, 월요일에는 더 지독하게 잔다. 부러운 일과다.


잘 때는 얼마나 웃긴지 모르겠다. 잠에 취해 코를 골 때, 몸을 뒤척이다 말고 괴상한 자세 그대로 잘 때, 꿈을 꾸며 발을 구를 때, 꿈 속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등의 털이 오소소 설 때(괜찮은 거지, 후추?), 뜬금없이 낮게 멍! 짖는 소리를 낼 때, ‘왜 때문에’ 딸꾹질을 할 때, 그런 저런 소리에 제가 놀라서 깼다가 다시 스르르 잘 때. 나는 어떻게든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찰나는 휙 지나가버리지만 운 좋게 동영상 몇 개 찍어놨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장면이다.


강아지가 잘 자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해서 요즘은 얘를 더 재우려고 화장실까지 참는 지경이 됐다.


최소 한두 시간은 푹 재우고 싶으니까. 후추가 낮잠을 잘 것 같으면 큰 컵에 따뜻한 물을 가득 따라 가져온다. 그때부터는 책상에만 앉아 있는다. 강아지는 깊은 잠을 못 잔다던데. 후추는 귀가 커서 그런가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꾸 깬다. 그러니 좀 잠든 것 같으면 절대 동작 그만이다. 기침도, 방구(!)도 참는다. 앉은 자세를 바꿀 때도 상당히 눈치를 본다. 부스럭거리다 후추랑 눈이 마주치면 민망함을 숨기고 크게 하품을 해보인다. 너 계속 자도 돼, 라고 하는 것. 그러는 동안 잠시 뒤 후추가 깨버렸을 때 해야 할 것들을 차곡차곡 계획해둔다. 초 단위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세세하게 할 일을 생각해두고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이 후추를 사랑하는 나의 미련한 마음이다.(덕분에 프리랜서의 업무 효율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얼마 전에는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고, 곁에 엎드린 후추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그러다 후추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자는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책 한 줄, 후추 한 번, 책 한 줄(아까 읽었던 그 부분), 다시 후추 한 번을 거듭 보다 정신을 다잡았다. 얼른 책 읽어라, 인간.

어쩐 일인지 그날은 후추가 깊이 잤다. 내가 후추를 데리고 오면서 꿈꾸던 완벽한 평화였다. 조용한 가운데 낮게 흐르는 음악. 평화롭게 잠든 강아지. 푹신한 소파. 마음에 쏙 드는 책. 이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돌처럼 앉아서 책만 읽었다. 오후가 지나고, 해가 점차 지고, 집이 어두워져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멋진 순간이었다.

책을 마저 읽어야 하는데 후추는 여전히 일어날 기미가 없다. 어두워진 거실에서, 책을 조용히 덮고, 후추를 가만히 지켜본다. 후추는 지금 꿈을 꾸는 게 분명하다. 입술이 바르르 움직이는가 싶더니 감은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꽤 빠르다. 이제 달리는 중. 다리를 어설프게 구른다. 픽 웃음이 난다. 이렇게 잘 때는 이 정도 피식거리는 소리에는 안 깨서 다행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 없이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너, 엄청나네.


사실 후추의 하루는 거의 내 손을 거쳐 이루어진다. 내가 사료를 그릇에 담아줘야 먹는다. 배변패드를 깨끗하게 마련해둬야 싼다. 목줄을 매주고, 현관문을 열어줘야 산책을 간다. 내가 이끄는 곳으로만 다닐 수 있다. 내가 데려가는 곳에서만 최대한 만끽한다. 내가 몸을 닦아줄 때, 털을 빗어줄 때, 배를 만져줄 때 온전히 내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는 후추. 그런 후추에게 나라는 세계가 너무 작지는 않은지 걱정될 때가 있다. 조바심이 나서 '강아지 운동장', '강아지 카페' 같은 것을 검색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런 후추에게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꿈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미묘한 안도감을 준다.


미묘한 것은 그 세계에서 나 없이 너무 신나진 않을까, 하는 것. 이건 무척이나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얼른 접는다. 그저 안도감만을 생각한다.


오늘은 약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빌었다. 후추 네가 꾸는 꿈이 즐거운 것이기를. 꿈에서는 언제나 좋은 순간만 만나기를. 신나는 모험을 씩씩하게 해나가기를. 목줄 같은 것은 없이 멀리 멀리 마음껏 뛰고, 두려운 것은 하나도 없어서 보이는 모든 것에 촉촉한 코를 들이밀어 냄새 맡기를. 그리고 안전하게, 나한테 돌아오기를. 알았지?




+) 내일이면 후추가 온 지 꼭 한 달이다. 오늘 처음으로 후추가 내게 안기지 않고 곁에 서서 얌전히 목줄을 맸다. 이제 산책은 세 번째 일기에 쓴 것처럼 힘들이지는 않고 나간다. 하루 하루, 후추는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뜻깊은 날이라 잊지 않으려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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