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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Feb 16. 2017

시선을 넘어서

『부모와 다른 아이들』,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이것이 진보


나는 나만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요. <청각 장애>나 다른 어떤 <장애>라는 용어로도 나를 규정하지 않죠. 수화를 금지당한 채 강요에 의해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두 개의 언어 대신에 반쪽짜리 언어를 사용하고, 그 때문에 장애인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같은 청각 장애인이 아닌 바에야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장애인 취급을 받지는 않잖아요.(『부모와 다른 아이들 1』, 132쪽)


‘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진보(進步)’의 정의를 곱씹어봅니다. 나아지거나 높아짐, 에 밑줄을 긋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여기, 가치는 진보하고 있는가. 시대정신은 얼마나 진보했는가. 좀처럼 답을 내놓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매일 저 정의를 의심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글을 볼까요. 화자는 청각 장애인입니다. 그는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장애라는 말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수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쪽짜리 언어를 사용하는 결핍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 질병과 장애를 언제나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무너져버립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네, 이것이 진보입니다.


다시 책을 더 들여다봅니다. 이 책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 등장하는 다른 시각 장애인의 목소리는 또 어떤가요. 가족과 반려자의 지지 속에 자신의 장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살아온 이 사람은 평소 장애를 인식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출산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엄마와 달리 시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족과 반려자가 안도하고, 시각 장애를 가진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예전의 찌릿한 아픔을 느끼고, 잠깐이지만 다시 한없이 고독해진다.”(『부모와 다른 아이들 1』, 68쪽)


고독함.

어느 개인을 온전히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지 않아 발생하는 불가피함.

저는 그런 것이 늘 슬픕니다. 저는 더 큰 목소리로, 시선을 넘어야 한다, 고 말하고 싶습니다. 장애나 질병을 개선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낡디 낡은 시선을 넘어서자고 말입니다.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언제까지나 앞으로 나아가지도, 다음으로 올라가지도 못할 겁니다.

(함께 생각해볼 글: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531)


사회는 결코 ‘진보’하고 있지 않다

(무려 21세기에)아직도 동성애를 고쳐야 할 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질병은 벌, 당신은 나와 다른 존재, 저들은 교화와 치료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동성애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당하고, 부모 중 한 명이 조현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이곳이니까요.


아니길 바랍니다만 혹시 ‘그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다시 어떤 사례들로 되묻습니다. 암 수술 이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사와 입학을 거절당한 사람들은 어떤가요. 갑상선암을 치료 받기 위해 병가를 냈다가, 자녀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휴가를 요청했다가 퇴사하게 된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언급한 사례들은 모두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에서 전한 실제 사건입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고, 개인의 경제 능력이 그 사람의 존재 이유가 되는 이 사회에서 이런 사례는 그 자체로 위협입니다. 생계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그를 사회로부터 배척하니까요. 거기에 조직과 사회가 가담하고 있으니까요.(‘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진실입니다.)

저는 내내 사회가 결코 ‘진보’하고 있지 않다(도리어 후퇴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사례들이 이 짐작에 확신을 주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

가난한 사람이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어느 연구를 떠올립니다.

교통사고, 암, 감기 몸살, 우울증, 이것들은 대상을 가리지 않지요. 갑자기 찾아온 질병, 장애 혹은 태어날 때부터 놓인 여러 상황 앞에서 나의 인간성을, 나의 삶을 폭력과 불평등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하나가 오직 '경제력'뿐이라면 그 세상은 너무나 황폐한 곳일 겁니다. 완벽한 건강은 없습니다. 완벽함, 자체가 인간 세상에는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할 곳은 모두가 완벽하게 건강한 사회, 쪽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은, 건강하지 않은 모두가 건강하게 관계 맺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사회, 쪽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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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30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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