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급 6,030원』, 『표백』
‘이 법은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전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생활안전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생활안전’이라 함은 밥다운 밥을 먹고, 아플 때는 (돈 걱정 없이)바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연구를 통해 검증된 적정 수면시간을 유지하는 것이겠지요. 여가 시간에 운동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겁니다.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하려면 자신이 하는 노동의 정체를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하고, 능력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계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영역의 노동을 경험하거나 공부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분은 없겠지요.
다시 저 문장을 봅니다.
최저임금법 1조.
2016년 7월 16일, 최저임금위원회는 2017년 최저임금을 6,470원으로 결정했습니다. 2016년의 6,030원보다 440원 오른 수준입니다. 이를 월급으로 환산하면 약 135만 원 정도. 숨이 막힙니다.
한 달 수입 135만 원은 ‘생활안전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수준인가.(‘김영란법’의 식사접대 상한선은 3만 원. 알다시피 정치권은 이마저도 너무 낮다며 5만원으로 상한선을 높이는 법 수정안을 추진중입니다. 3만원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약 4시간 반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제 최저임금은 평생에 걸쳐 언제든지 마주할 수 있는 ‘평생임금’이 되어가고 있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해고, 계약 만료,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등이 벌어질 경우, 다시 말해 한순간 삐끗하면 최저임금 수준의 열악한 일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이런 시급 6,030원』, 26쪽)
언제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 사회, 이 시장에서 최저임금은 사실상 기준임금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최저임금이란 ‘최소한 이 정도는 주어야 한다, 더 적게 주면 법적으로 처벌 하겠다’는 의미 아닙니까.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최저임금은 사실상 기준임금입니다. 최저임금보다 더 주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이 아니라 딱 이만큼만, 에 가깝습니다. 정말 숨이 막힙니다.
그럼에도 노조 없는 이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사실상 “유일한 임금 인상 교섭 창구”인 최저임금위원회는 처참할만큼 뒤처진 현실인식수준을 보여줍니다. 2016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의사결정 진행 과정을 담은 책 『이런 시급 6,030원』을 보면 사용자위원회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최저임금 직접 영향권에 있는 노동군을 “용돈 벌이”(52쪽) 수준으로 폄하하거나 한 달 생계비안을 90만 49원(74쪽)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으로 위원회에 제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명적인 이런 시선 차이는 “사용계는 노동과 생존을 반복하며 노동에 집중할 수 있는 ‘근로자’를 원하지만, 노동계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주체적 노동자가 되길 원한다”(272쪽)고 적은 문장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용자(영세 자영업자 포함)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이들은 노동자(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에는 도무지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파행을 겪으며 겨우 몇 백 원 수준의 인상을 해놓습니다.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는 없는 걸까요.
그러나 앞서 살폈듯 최저임금법 1조는 최저임금을 단순히 ‘노동과 생존을 반복’해 노동에만 집중하는 조건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두 키워드, ‘생활안전’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은 간신히 생존하는 조건으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급 6,030원』을 읽는 일이, 최저임금위원회의 중요성과 파급력에 비해 이 위원회의 결정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탁상공론에 머무는 수준으로밖에 진행되지 않는지를 지켜보는 일이, 그래서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2011년에 출간된 장강명의 소설 『표백』 속 인물들은 삶을 낙관하지 않고 미래를 희망하지 않는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은 가장 적극적인 의지 표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요. 이들은 기성세대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마치 저 최저임금위원회의 사용자위원회처럼 젊은이들이 서 있는 땅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말에 설득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만큼 깊이 좌절했으며 삶을 공허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이들의 자살은 그러니 과히 극단적이지도 않은 거지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런 존재들의 노동을 노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청년의 도전정신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소설의 주인공 입을 빌려 눈 좀 뜨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표백』, 27쪽)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쪽에서 노력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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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38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