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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r 06. 2020

체념 증후군

넷플릭스 다큐 <체념 증후군의 기록>(2019)


그 험악한 일들



오월 빛깔, 서늘한, 시간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것, 뜨겁게 

입안에서 들린다. 


다시금,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아파 오는 안구의 밑바닥. 

눈꺼풀은 

가로막지 않고, 속눈썹은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눈물 반 방울, 

한층 도수 높은 렌즈, 흔들리며,

너에게 모습들을 전해 준다. 

(파울 첼란, 「눈 하나, 열린」전문,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체르노비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20년, 유대인. 이 두 가지 정보만으로도 그의 험난한 삶을 짐작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가 살던 체르노비츠는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확정되고, 독일군 점령 지역이 됐다. 첼란의 부모는 첼란이 친구 집으로 피신한 사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첼란 역시 결국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는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지만 이때의 기억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1970년 센 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할 때까지(강에 투신한지 약 한 달이 지나서야 13킬로미터쯤 떨어진 강어귀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첼란은, 계속 시를 썼다. 그것도 독일어로. 

나는 이 삶의 비극을 떠올릴 때마다 좌절한다. 


그는 독일에서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첼란이 태어난 체르노비츠는 합스부르크가 왕령이었기 때문에 모국어가 독일어였다. 다른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그는 독일어로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를 엮고 번역한 전영애 선생은 자신의 책 『시인의 집』에서 첼란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나라의 언어이며 살인자의 언어였던 독일어로 시를 남겼다. 그 언어가 모국어였고 '문학어'였던 것이다."라며 이를 '그 험악한 일들'이라고 표현했다. 

험악한 일들. 감히 그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Life overtakes me


오래 서가에 자리하고 있던 파울 첼란의 시집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얼마 전 본 다큐멘터리 때문이었다. 


<체념 증후군의 기록(Life overtakes me)>이라는 제목의 이 다큐멘터리에는 '체념 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에 시달리는 아동들과 그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이 충격적인 증후군의 증상은 이렇다. 처음에는 말을 안 하고 누워만 있게 된다. 먹는 양이 점점 준다. 그러다 먹고 마시는 걸 완전히 중단하고, 그저 잠을 자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 마치 혼수상태와 비슷한 상태로 외부 자극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데 때로는 그 기간이 수년이 되기도 한다. 


2003년-2005년 경 발견되기 시작한 이 증후군은 지난 15년 동안 정신적 외상을 입은 스웨덴 거주 난민 아동 수백 명에게서 발견되었다. 


어린 다샤의 경우, 심한 고문과 강간 등 국가 폭력을 피해 스웨덴으로 도망쳐 온 부모와 함께 산다. 다샤는 고국을 떠나온 이유를 몰랐지만 1년 반을 기다린 가족의 난민 인정 요청이 거부되고, 그 판결문에 드러난 가족의 비극을 알게 되자 서서히 활력을 잃고 잠으로 빠져들었다. 세상과 연결하는 모든 문을 걸어잠그고 누워버린 것이다. 가족은 눈을 감은 다샤에게 매일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고, 동화를 읽어주고, 몸을 만져준다. 하지만 다샤는 몇 개월째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상태다. 어쩌면 더 깊이 잠으로 빠지는 듯하다. 세상으로부터 가능한 한 더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듯이. 


의사들은 체념 증후군의 회복이 대체로 가족이 안정감을 느낄 때 이뤄진다고 말한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이들에게 낙관의 분위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평화로운 말투, 다정한 어루만짐, 희망적인 분위기, 이 모든 것을 느끼며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놀랍게도 다샤는 이들 가족이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 승인을 받았다는 내용의 판결문을 읽어주자 서서히 깨어났다. 

희망을 감지한 것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


다큐멘터리 제목에 쓰인 'overtake(1.추월하다   2.(수·양·중요도 면에서) 앞지르다   3.(불쾌한 일이 사람에게) 불시에 닥치다)'라는 단어에 한참 머물러 있다. 한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사건이 100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벌어지고 있다. 삶에 압도되었을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요즘은 '그럼에도 희망하기'의 위대함을 많이 생각한다. 


파울 첼란은 "말하기 위해서, 방향을 잡기 위해서, 제가 어디 있으며 저를 끌고 가는 힘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제 자신을 위한 현실을 기획하기 위해서" 시를 쓰려고 했다고 말한다. 어린 다샤는 가족의 변화를 감지하고 비로소 눈을 떴다. 그 선택, 그럼에도 한 번 더 해보자는 그 순간의 나아감이 얼마나 내게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거기에 삶의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희진의 책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는 "삶과 죽음의 유일한 차이는 행이든 불행이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능성이다.(중략) 죽음의 반대는 호기심,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불안과 설렘이지 당위로서의 생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전적으로 옳다. "그래도 살아야지" 같은 말은 끔찍하다. 투명한 희망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나? 파울 첼란과 다샤에게서 발견한 얼룩덜룩하고 비틀린 희망, 절망으로 뒤덮일지도 모르는 희망, 앞을 없는 불안함이 가득한 희망, 그럼에도 희망, 그래서 희망을 엿본다. 나는 경지가 놀랍다. 진실의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자꾸 그런 이야기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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