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책도 여러 권 썼고, 그 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기도 한 그 작가는 묘하게 위화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꾸 "우리 같은 약자", "그들", "갑들은" 같은 말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를 만난 지 20분 만에 깨달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충분히 ‘강자’였는데 자꾸 자신을 ‘을’의 위치에 놓았다.
‘이봐, 여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 당신이 제일 갑이잖아.’
그 작가와 헤어질 때까지 나는 그 생각을 했다.
따져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나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었던 적 말이다. 그건 편리한 일이었다. 우선 나를 탓하지 않아도 된다. 편 구분하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니까, 적을 만들어 욕하기는 쉽고, 그래서 유용했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적은 뿔 달린 괴물처럼 정말로 나와 다른 존재로 느껴졌다. 벌 받아야 할 존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 어쨌든 일정 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여성이며 비정규직인 나는 편을 확인하고, 투덜대고, 분노하면서 손쉽게 ‘저들’을 탓했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나 약자인 사람이 있을까. 언제나 강자이며 가해자인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글쎄.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시간은, 그리고 공간은 나의 위치를 번번이 뒤바꿔놓는다. 지금 나는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지낸다.
을이 갑이 되는 일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은 순간이다. 알든 모르든 모두가 매일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긴장된 줄타기를 하고 산다. 일터에서 만난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식사 시간이, 혹은 술자리가 길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 지금 나에게는 중요한 숙제다. 그들의 근무시간을 지키고 그 시간 안에서만 업무 연락을 하는 것도 중요한 나의 규칙.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내가 일거리일 수 있다고 항상 생각하려 애쓰고 있다. 이는, 당연하게도, 나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자유로운 ‘작가님’들이 주말도 저녁도 없이 연락을 해오거나 행사가 끝난 후 가볍게 시작된 술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지곤 했던 출판사 시절. 그들은 악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설마 막내 직원에 불과한 나를 괴롭히려고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필요와 즐거움이 누군가의 필요와 즐거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더 하지는 않았을 뿐. 그런 생각을 하면 자세를 조금 고쳐 앉게 된다.
시간이 지나 뜻하지 않게 나도 갑자기 “작가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아연함이 떠오른다. 조금 소리치고 싶었던 그 심정은 곧 ‘아, 나도 이제 자칫하면 금방 나빠질 수 있겠구나’하는 어떤 깨달음을 가져 왔다. 하루를 보내고, 나이를 먹고, 내게 (하찮을지라도)한 줌의 권력이 주어질수록 그때의 심정을 떠올린다. 보잘 것 없는 한 줌 권력으로도 금방 나빠지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언젠가의 뉴스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았다. 대기업 오너 가족의 횡포를 규탄하는 시위, 그곳에 나온 사람들을 감시하고, 채증 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과 똑같은 회사 직원이었다. 인사부라던가. 많은 것을 각오하고, 그럼에도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온 동료들이었다. 이들의 얼굴과 발언을 염탐하는 사람이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사실을 곱씹자 좌절감이 몰려왔다. 정말 좌절하게 되는 건 이런 것이다. 동료를 채증하고 있는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성실하게 회사 생활을 한 평범한 아버지일 수도 있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을이니까,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자기 위로를 했을지도. 그러나 설령 이들이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느끼며, 가족을 떠올리고, 갚아야 할 대출금을 생각하며 자괴감 속에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자신이 좋은 선택을 할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그가 한 일이 누군가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벼랑 아래로 밀어버린지도 모르는데. 무서운 일이다.
매일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사소할지라도, 하찮을지라도 자신이 가진 한 줌의 영향력을 늘 인식하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자신의 사소한 선택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깊이 생각하는 삶은 또 얼마나 드문가. 얼마 전 읽은 책에서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세월호 사건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처벌될 때까지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했던 먼 나라의 음악가. 나는 그 음악가 이야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울컥하게 된다.(그는 아직도 한국에 오지 않았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오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프리모 레비다. 그 삶의 곡진한 이야기들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경험과 그 이후의 발자취들이, 끝내 자살해야 했던 그의 심연이 내게는 그 자체로 삶의 총화(叢話) 같아서. 그리고 레비의 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는 한 사람, 로렌초, 그를 기억하고 있다.
나와 로렌초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내가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無化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186-187쪽)
나는 이 문장을 거의 외울 수도 있다. ‘인간성’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나는 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약간 성가신 굶주린 시선을 피하기 위해, 혹은 일시적인 인간적 충동에 의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에게 가끔 빵이나 감자 하나를 던져주는 사람들은 “대체로 노골적으로, 경멸과 동정이 뒤섞인 뉘앙스로, 이와 같은 삶을 선고받고, 이런 상황으로 떨어진 걸 보면”,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죄를 지은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굴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 민간인들은 이들을 노예라고, 도둑이라고, 사기꾼이라고 쉽게 생각해버렸다. 그들은 “서로 죽 한 입 더 먹겠다고 사방에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가 제일 힘센 사람이 그것을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낙담에 빠져 절룩거리며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빵을 던져주는, 아주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달랐다.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였던 로렌초는 “여섯 달 동안 매일” 수용소에 있는 레비에게 빵 한 쪽과 자기가 먹고 남은 배급을 갖다주었다. 아무런 의심도,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없이 누덕누덕 기운 자기 스웨터를 선물로 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태도로 레비를 위해 이탈리아로 엽서를 보내주었고, 답장을 전해주었다. 레비는 로렌초의 존재만으로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레비는 자신의 아들에게 로렌초, 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내게 ‘로렌초’가 한 명의 사람일 수 없는 이유다. 그가 끝없이 상기시킨 어떤 가능성.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가 가닿아야 할 목적지라고 생각한다. 바로,
지금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인간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존재이지만 드물게 좋은 선택을 할 줄도 아는 존재라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내가 만난 그 시절의 작가가, 동료를 채증 하던 사람들이, 내 코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이리 저리 휩쓸리던 과거의 내가 지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조금 기운이 난다. 살면서 한 번 쯤은 만났던 ‘나의 로렌초’들을 떠올리면 도저히 다른 ‘민간인’들처럼 사람을 대할 수는 없는 일. 여섯 달, 로렌초와의 짧은 교류가 레비를 살게 했던 것처럼 짧은 한 순간이나마 내가 누군가에게 로렌초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서 로렌초를 발견하며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가기를 언제나 바란다. 우리는 지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