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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n 01. 2020

당신 무슨 일 하세요?


누군가 "당신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 자주 생각한다. 한 군데 속해 일하는 형편이 아니니 어렵고, 하는 일의 성격이 저마다 다르니 곤란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무엇을 얘기하고 무엇은 얘기하지 말까.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 덜 어려워졌다. 듣는 사람보다는 나를 생각하기로 한 참이다.(나는 나를 무슨 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영화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인물이 "나는 시인이오."라고 답했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대번에 좋아하게 됐다. 모두가 일하는 시간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모두가 잠을 자는 시간에는 시를 쓰는 그 인물. 시집을 한 권 내보지도 않았고, 남들이 금방 이해할 사회적인 직업(의사였던가?)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시 쓰는 사람, 그러니까 시인이라고 밝히다니. 그 행위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표현할지 신중하고, 솔직하게 결정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좋았다. 시인이란 나 자신의 정체성임을 담백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영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인다. 매일 쓰지는 않으니 그렇고, 내 글이 읽는 사람들에게 내보일만큼 자신 있지 않아서 그렇다. 내 이름의 책 한 권이 없는 것, 글을 어딘가에 발표하고 있지 않은 것, 주수입이 '내 글'이 아니라는 것... 망설이며 대는 핑계는 이렇게나 많다.('작가'라는 호칭 앞에서 늘 어색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작'은 지을 작(作). 무언가를 짓는 사람이라는 이 호칭을 왜 두려워할까? 늘 생각하게 되는 문제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쓰는 사람, 이라고 말하고 싶다.


친한 친구에게 우스개로 "내 글을 내가 제일 좋아하지"라고 말했다. 함께 퐈하핫- 웃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진심이다. 글이 되기 전의 모든 과정을, 그 지난하고 자괴감 들고 망설이면서 밀고 나가야 했던 모든 순간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행위는 무엇보다 나를 넘어서려는 행위고 나를 끝내 넘지는 못하는 결과를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을 끝끝내 째려보면서 싫어하다가 고치고 다듬고 읽고 또 읽은 후에 조금씩 좋아하고 마는 것. 이 단어를 고르기 위해 비교해본 단어들, 저 문장을 쓰기 전에 썼다가 지운 문장들,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살살 문질러서 부드럽게 만드는 모든 과정들이 만든 순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나는 알고 있다.


쓰는 과정이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다는 점도 내게는 중요하다. 쓰는 사람이기 전에 나는 읽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의 글이 고정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읽는 사람이 있는 한 하나의 글은 완고한 생각에 작은 틈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상상하지 못한 곳까지 닿을 수 있다. 그 '만남'은 그 어떤 충만한 만남보다 깊어서 마치 부풀어오르는 풍선처럼, 팽창하는 우주처럼 세상을 넓힌다.

책 한 권이, 글 하나가 나를 바꿔놓았던 무수한 순간들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래서 또 쓰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내가 어느 곳, 언젠가에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여기 있으니 그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당신, 외로워하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을 위해 써라.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하지 말고. 글쓰기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 도리스 레싱


어쩌면 쓰지 않을 때도 나는 쓰고 있을 것이다. 커피 전문점에서 매장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는 중년 남성을 보았을 때, 나라가 망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네 주민을 만났을 때, 어린이에게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이웃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가까운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뉴스를 보았을 때, 자신의 성별, 인종, 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도 쓰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을 보고 있을 때도, 나와 함께 사는 식물이 새 잎을 내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도, 소나기가 내리자 소란하게 울어제끼는 개구리들의 울음을 들을 때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한 자리에 앉아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온갖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도, 어린이 친구가 '다요'체를 쓰면서 전해주는 자신의 하루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도 쓰고 있다. 글쓰기가 삶 그 자체가 되도록, 나 자신을 위해서.  


오늘도 게으르고 성실하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이렇게나 길다. 그리고 이 이유들은 고스란히 "당신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글을 써요"라고 답하고 싶은 망설이는 사람의 이유기도.




+) 혹시 의사가 "나는 시인이오"라고 말하는  영화, 정보값이 너무  떨어지지만 부디 제목을 아는 분이 계시다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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