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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ul 06. 2020

확장이라는 것


아담한 주목나무를 오르락내리락, 아기 고양이 둘이 놀고 있었다. 어미는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 둘레에 나와 산책자들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서 함께 구경했다. 고양이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가방에 간식이 없어서, 맑은 물 한 컵이 없어 아쉬울 뿐 다시 떠올려도 그대로의 평화인 순간이었다.

평화는 늘 순간이다. 이 평화를 깨뜨리는 데에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면 족했다.


“아이고, 저놈의 고양이들 때문에 다닐 수가 없다니까.”


그 사람은 한 손에 줄을 쥐고 있었다. 줄 끝에는 언제나 행복할 것 같은, 예쁘게 차려입은 강아지가 혀를 조금 내밀고 헉헉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떤 생명체와 삶 한 조각을 나누며 사는 이의 입에서 다른 생명체를 배제해버리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람은 곧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버렸다. 어쨌든 이웃이었다. 순식간에 울고 싶어졌다. 방금과 같이는 아기 고양이들을 바라볼 수 없었다. 걱정과 응원, 기원을 있는 힘껏 고양이들에게 전하(려 애쓰)고 걸음을 옮겼다. 뒤로 “자기 개만 동물인가. 참 나.”하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세상에는 고양이를 그냥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모르는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겠지. 강아지가 고양이만 보면 흥분을 해서 산책이 엉망이었던 적 있을까.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생각들. 괴로웠다. 억울하기도 했다. 저 사람은 이런 애씀을 짐작이나 할까.

그만 두자, 했지만 요즘 그러질 못한다. 번번이 속이 상한다.


의아한 것은 이런 것이다. 자녀를 키우면서 집 근처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딸을 키우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자들. 손자가 있으면서 임산부 배려석에 떡하니 앉는 아저씨들. 늦도록 취직이 안 돼 학교에 머무는 자녀와 함께 살면서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 자녀를 갖가지 방식으로 학대하는 사람들, 가사노동을 당연히 (나 아닌)누군가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 사람들.

 

어디까지를 ‘나의 일’, ‘나와 상관있는 일’로 말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를 적어본다. 우선 성차별, 여성혐오범죄와 같은 일은 도저히 남의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직장 상사의 성추행 뉴스를 보면 새벽까지 이어졌던 그 술자리가 떠오른다. 이별하자는 사람을 찾아가 살해한 범죄자(어쨌거나 이별 운운,은 알고 싶지 않다. 그 범죄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정확하게 표기하는 뉴스는 왜 이렇게나 부족한지.) 뉴스를 보면 광기와 분노가 가득 찼던 그 눈빛이 떠오른다. 유리 천장에 관한 뉴스를 보면 결혼을 앞두고 권고사직 당한 친구들과 내가 거쳤던 직장의 꽤 높은 곳에 앉아 있던 꼭 닮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꽤나 많은 일이 나의 일이 된다. 건설노동자로 산 아버지의 존재가 노동 현장에서 다치고 죽는 노동자들을 바라보게 하고, 고졸 학력 동생의 존재가 오래된 학벌주의 문제를 되묻게 한다. 조카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는 세상 모든 어린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고, 약자로서 이들이 살아갈 사회의 안전망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삶은 확장한다. 한 뼘에 불과하던 어린 나는 확장과 함께 어른이 된다. 살아가는 일이 조금이나마 의미 있다고 느낄 때는 바로 이럴 때. ‘나의 일’이라는 것이 점점 넓어질 때다. 타인의 삶과 나의 접점을 찾고 공감 영역을 넓혀가는 일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일에는 별 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2쪽


확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은 곧 안도감이다. 모른다는 것은 때로 죄가 되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확장을 했다면 그 조금만큼 덜 나쁜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면 하루가 약간은 가뿐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울음도 늘 여기에서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확장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 같지는 않으므로. 내가 번번이 마주치는 이웃들처럼.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 훈육을 빌미로 자녀를  밖으로 쫓아내는 사람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고양이의 밥과 물을 챙기는 사람이 이웃에 산다. 쓰레기를 투기하는 사람과  앞의 화단을 가꾸는 사람이  동네에 산다.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수가 없어진다. 어떤 날은 온종일 이런 생각에 힘을  빼앗긴다.

그러다가 책을 읽는다. 책에는 확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미뤘던 겨울 빨래를 하면서 옛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너희들의 호랑이 할머니, 아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송구스럽고 그러면서 한편 가슴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빨래 더미에 묻혀 허우적거리다가 한세상을 사신 것같이도 여겨지기 때문이다.(중략)
그러나 말이다. 결정적인 것은 병민이가, 자랑스러운 병민이가 우리 가족에게 나타나고서부터였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사랑스럽고, 또 애기들을 귀여워하고 잘 돌봐주기도 하는 병민이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빠는 잔뜩 긴장하였다.(김병민,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130쪽-134쪽)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는 김근태와 인재근의 옥중 편지를 이들의 딸 김병민이 엮은 책이다. 김근태는 감옥에서 아내 인재근 외에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도 종종 편지를 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인병민 딸에게’라는 편지다. 이 편지는 “인병준과 인병민에게”로 시작한다. 김병준과 김병민이 아니다. 인병준과 인병민. 1991년의 김근태는 자녀들을 “엄마와 아빠의 딸과 아들이지만” 이들 모두가 온전한 한 명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신나게 그리고 보람 있게 살아가고자 하는 친구이고 동지”라면서 “생생한 진실 구현의 길에 나선다면 우리 넷은 그야말로 더욱 탄탄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버지의 김 씨 성을 “불가피하게” 따르고 있지만 너희가 원한다면 인 씨 성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오히려 “너희들이 약간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본다면 정말 기뻐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감옥에서 빨래를  때면 손등이 터져가며 이불 빨래를 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딸의 존재을 생각하면서 “성별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자연의 섭리로 결정되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차별을 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임을 거듭 되새기는  모습.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는 안다. 그리고 잠깐  아버지에게서 “ 번째 생일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잠시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보다는  주변의  번째 생일을 맞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삶을 확장하다가 감옥에 갔다. 고문을 받고, 고문 후유증을 앓다가 죽었다. 어떤 사람은  반려견에서 길고양이까지도 삶을 확장하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위대함과 하찮음이 너무도 어렵다. 하지만 어떤 불면의 밤에는 괜스레 다짐하곤 하는 것이다. 확장이라는 것을 내일도 조금 해냈으면, 조금만  많은 사람들이 그랬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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