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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r 21. 2017

작은 일에 분개하는 일

박완서,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조금 복잡한 마음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중략)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 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일상의 여러 대목에 이 한 구절,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가 떠오릅니다. 그것은 반성하는 마음과 화를 내는 마음이 뒤엉킨 조금 복잡한 마음입니다. 일찍이 작가 박완서도 그랬던 듯, 그의 산문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작가가 ‘작은 일에 분개’한 사연이 솔직한 목소리로 담겨있습니다.


제목이 교묘해서, 작가의 분개는 오히려 늘 작은 일로 시작합니다. 어느 음식점에서 목격한 회사원들의 회식 자리, 그곳에서 유독 여성만이 술시중과 음식시중을 전담하는 모습에 분개합니다. 그런가 하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늘 한 자리 차지하는 며느리와의 갈등을 곱씹고, 장난감 갖고 노는 손자의 모습을 보며 물질의 풍요와 인간의 행복을 우려하느라 분개합니다. 특히 책의 제목에 해당하는 글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겪은 사건을 단편 소설로 써낸 일과 그로 인해 겪게 된 억울한 사연에 관한 작가의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지요. 작가는 옥바라지를 하며 겪은 관(官)의 비리와 횡포, 사실 관계도 따지지 않은 언론의 모욕과 같은 ‘큰일’에 대항하지 못하고 다만 소설을 쓸 뿐이었던 자신을, 남편의 뜻에 따라 순종할 수밖에 없던 무력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작은 일에 분개하는 작가의 사유는 그러나 곧장 큰일에 대한 분개로 메아리칩니다. 작은 일에 분개함으로써 바람에 씻길 뻔한 일들이 모습을 잃지 않고 ‘분개할 만한 일’이 됩니다. 작가는 “한물 간 얘기를 책으로 묶어내는 염치없는 짓”을 걱정했고, 이 오래된 책에는 물론  오래된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대개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생생하게 살아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깨우침을 줍니다. 저는 자꾸 그의 글을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더 중요한(?) 일에 분개하라

세상에, 분개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더구나 어떤 다짐 이후 저는 아주 작은 일에 번번이 분개합니다. 그동안에도 큰일까지 분개해야 하니, 때로는 작은 일에 분개할 힘을 잃고 맙니다. 이럴 때가 아주 초조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은 분개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일에 분개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역사 속에서, 현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에 분개하지 않아 큰일이 된 문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부정에 눈 감고, 비리에 눈 감고, 정치 로비에 눈 감아온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대통령 부정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분개할 큰일 때문에 작은 일을 외면한 결과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자꾸 외면한 작은 일들 때문에 작은 일보다 조금 큰일에도 분개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큰일에도 분개하지 않게 되고, 마침내 어떤 일에도 분개하지 않게 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조금 더 작은 일에도 분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차별, 주변에서 저지르는 작은 부정에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겁니다. 때때로 겁쟁이가 되고, 분개의 화살이 나 자신에게 꽂혀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나를 반성하고 다시 또 힘을 내 여기저기 분개의 시선을 내던지려고 하는 겁니다. 시인이 시 구절에서, 작가가 글 속에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고백하고 반성한 것은 결코 작은 일에 분개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나의 일상을 엄격하게 다루고 작은 일에 분개하다보면 지금의 부끄러움은 점차 사라지게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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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44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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