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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Mar 08. 2017

작가와 나

장 미셸 게나시아,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알람이 울렸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가문을 길게 설명하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한 위대한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렇지만 들어가는 입구에서 곧바로 걸려 넘어졌는데요. 바로 “영국의 식민지 공무원 중에는 나쁜 사람도 아주 많았지만 좋은 사람은 또 정말 좋았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말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네, 압니다. 세상은 짐작할 수도 없는 중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무엇도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사실, 잘 알지요.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어둡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어두운 무한 상대성의 세상이기도 하니 이곳에서의 삶은 언제나 회의(懷疑)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저 ‘좋은 식민지 공무원’이라는 말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선한 노예상’이나 ‘너그러운 가해자’처럼 말이지요. 저는 이것을 감수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회의의 시선은 언제나 더 많이 가진 쪽을 향해야 하고, 그쪽이 비록 내쪽일지라도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쪽에서 이런 이해를 한다면 작가는 저쪽에서 저렇게 보는 편을 더 고려해야 하지 않나. 영국 식민지 공무원을 지낸 ‘좋은 사람’ 도킨스 어르신을 이야기하는 리처드 도킨스를 읽으며 날카로운 알람이 울렸습니다.


하지만 종종, 조금은 포기하는 마음이 됩니다. 인간이란 언제나 나약하기 때문에, 제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자신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사실을 수긍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다 ‘작가의 삶과 작품’이라는 오래된 문제에 골몰하게 된 겁니다.

작품은 그 자체로만 평가해야 하는가? 작가의 삶은 작품과 상관이 없는가? 매력적인 작품의 매력 없는 작가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사랑하던 작가의 치부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언제나 더 기대합니다

떠올리면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하는 소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에는 몇 가지 빛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행복해집니다. 그 중에서도 손꼽는 장면은 열정적으로 책을 탐독하는 어린 주인공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조언. 여기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어느 비열한 작자의 소설을 읽고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의 신념을 공유하거나 그의 공모자가 되는 건 아니란다. 그 작가의 재능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의 도덕성이나 이상을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거든. 나는 벨기에 출신 만화가 에르제와 악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탱탱의 모험』을 좋아해. 그리고 말이다, 너 자신은 나무랄 데가 없니?(『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67쪽)


조금 위안이 됩니다. 

아니요. 여전히 부족합니다. 저는 작가에게서 아름답기만 한 작품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더 기대합니다. 이를테면 비범함, 예민함, 날카로움, 치열함, 고뇌, 연대의식, 속죄, 비타협성, 혹은 그 모두.


그런 문학이 지금, 여기, 21세기에도?

나치 친위대 복무 경험을 뒤늦게 고백한 귄터 그라스나, 김동인과 이광수 같은 친일 부역 작가를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김수영의 시 ‘죄와 벌’에서 폭력성과 여성혐오를 발견(‘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중략)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아니 그보다도 먼저/아까운 것이/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한 일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과거’라 최대한 양보한다고 쳐보지요.

그러나 그런 문학이 지금, 여기, 21세기에도 창작되고 있다면 이야기는 많이 다릅니다.


문단 내 성폭력. 작품 속 여성혐오. 이제부터는 도저히 그런 작가의 작품들을 전과 같은 느낌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지난 몇 년 간 애써 챙겨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도 더 이상 즐겁지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의 말은 재미도, 감동도 없습니다. 특히 누구보다 예민해야 할 작가들이 지금도 차별을 일삼고, 그것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차별을 지적당하자 차별에 반성하는 쪽이 아니라 지적에 화를 내는 쪽을 선택한다면, 그런 게으른 작가라면 응당 걸러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입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이 불가역성을 이제는 모두 받아들이자는 말이 뭐 그렇게 어려울까요.


불손한 독자

작가와 나의 대결에서 나는 언제나 작가에게 집니다. 그렇지만 ‘대개는 독자들도 저자들에게 좀 불손해도 된다, 왜냐하면 독자와 저자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성이 있다’고 했던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이렇게 불손한 독자들이 억울한 작가라면, 그 역시 포기해야 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까운 생각도, 가지지 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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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50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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