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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Sep 18. 2017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애너벨 크랩, 『아내 가뭄』

정말이지 진력이 납니다

우연히 누른 기사였습니다. 벌써 누르면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아내와의 쇼핑, 행복하신가요?’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기사에는 백화점 한 구석에서 휴대전화를 보거나 늘어져 자거나 거의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의 남자들 사진이 가득했습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쇼핑은 ‘고문’수준’이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사가 지치지도 않고 재생산되다니. 정말이지 진력이 납니다.

저는 여기에 공감하는 남자들이 궁금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주 아내와 ‘백화점’ 쇼핑이라도 한단 말인가? 남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아내들이 명품 가방이나 보석이라도 사나? 아닐 겁니다. 그런 쇼핑이라면 그들은 취향 잘 맞는 친구와 가는 편을 택할 겁니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가족 혹은 지인의 생일을 앞두고 선물을 사러 왔는데 왜 남자는 구석에서 잠을 자고 스스로 고문을 당하는 걸까요. 아이의 준비물, 떨어진 세제나 생수, 심지어 당신도 먹을 식재료와 술을 사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남자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의 고단함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여자들에게 21세기는 언제 오는지

요즘은 곰팡이와의 전쟁 시즌이니 베이킹소다와 구연산, 과탄산소다를 사야 합니다.(쇼핑1) 이것들로 세탁조 청소를 합니다.(청소1) 스프레이형 곰팡이 제거제도 사야 하지요.(쇼핑2) 넓게 퍼진 곰팡이에 제격인데 이것은 미세먼지가 적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을 택해 집안 환기를 단단히 하고 사용해야 합니다.(청소2) 젤형 곰팡이 제거제도 물론.(쇼핑3) 이것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오랜 곰팡이에 좋습니다.(청소3) 역시 환기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더위에 약을 뿌리고, 지우고, 걸레를 빨고, 널고, 화장실을 말리고, 다시 창궐하는 곰팡이를 노려보는 일련의 짓들을 반복하다보면 도대체 여자들에게 21세기는 언제 오는지, 깊이 한탄하고 마는 것입니다.(방수 무선 욕실청소기가 있다는데 그걸 아직도 ‘쇼핑’하지 못했습니다. 가격비교와 쿠폰할인 등등을 고려하는 일도 무척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집안일의 극히 일부분이지요. 저녁 한 끼를 차리는 데도 메뉴 구상, 식재료 구입과 정리, 불과의 싸움이라는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으며 식사 후에는 다시 설거지와 다음 끼니라는 거대한 벽이 기다립니다. 땀에 전 빨래, 조금만 잘못 말려도 냄새 나는 수건, 짧은 식재료 생존 기한, 모든 것이 관리 대상이며 곧 쇼핑이라는 ‘업무’가 됩니다. 부지런해도 티는 안 나지만 조금만 게으름을 부리면 바로 쌓이고 무너지는 일들.


그런데 여자들이 집안일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대부분 여자 잘못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거나 집이 더러우면, 부주의하다면서 여성을 맹비난한다. 여성과 남성이 청결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남녀의 득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아내 가뭄』, 212쪽)


여자가 하기 좋은 일

프리랜서인 저는 무려(!) 업무 현장에서 만난 남자들에게 ‘여자가 하기 좋은 일’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여자의 일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서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사와 육아는 여자의 일이라는 기본 전제와 그럼에도 여자 역시 돈을 벌어 와야 한다는 저열한 욕망, 같은 사회활동을 두고도 자신의 일을 주(主)로, 여자의 일을 부(副)로 규정하는 권력이 저 한 마디에 뒤섞여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기, 한편에서 조그맣게 반론하는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이른바 ‘교환 협상’시스템, 그러니까 남자는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여자는 전업주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남자도 전업주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 혹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 분리수거를 때맞춰 하는 일, 청소기를 돌리는 일 등 남자도 집안일을 많이 한다는 항변 말입니다. 감동적이기까지 한 책 『아내 가뭄』의 저자도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당연히 집안일을 20시간 이상 하는 남자들도 많다.”고 어떤 목소리들을 달래고 있습니다. 남자가 전업주부로 역할을 바꿨을 때 직면하는 어려움도 인정합니다.


무려 4.8배 차이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목소리들이 힘 받기는 매우 어렵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우리들에게 통계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보시죠. ‘2016 일, 가정 양립 지표’라는 통계청 자료에서 맞벌이 가구 남자의 가사노동 시간은 40분, 여자는 3시간 20분이었습니다. 무려 4.8배 차이입니다. 맞벌이 가구에서 말입니다. 더 기가 막히는 점은 이 수치가 외벌이 가구와도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남자 47분, 여자 6시간 16분) 남자가 일하지 않는 주말에도 이 격차는 줄지 않고, 자연히 여자는 수면시간이나 식사시간, 여가시간이나 자기계발시간까지도 남자보다 적게 갖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전업주부가 되어 이 모든 수치를 뒤바꿀 것이라는 말을 믿어야 하나요? 돈 버는 아내가 있는 남자들의 가사노동시간이 채 한 시간이 안 되는데도?

슬프게도 그러는 동안 여자들은, 특히 자녀가 있는 여자들은 “마치 직업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시달립니다. ‘민폐녀’, ‘맘충’ 같은 딱지를 달고 삽니다. 여자들이, 한 사람의 시민이 되려면 몇 세기를 더 지나야 합니까.


모두 아내가 필요하다

그저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산과 경력을 두고 저울질 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양할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돈을 더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유리천장 같은 건 고민하지 않고, 성취를 온전히 성취로 인정 받으면 좋겠습니다. 업무 시간을 불태우고, 퇴근 후에는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으면 좋겠습니다. 아내가 다려준 바삭한 셔츠를 입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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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63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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