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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Sep 08. 2017

죽은 것도 아닌데 죽은 여자들

마거린 애트우트, 『시녀 이야기』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일 년 전 어떤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충격이었고, 분노였고, 하염없는 우울감과 두려움이었던 복합적인 감정이 계속 밀려왔습니다. 저는 참담했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서서 울음을 꾹 참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나갔습니다.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하필이면 5월의 빛이란 것이 어떻게나 환한지, 저는 그 처참한 간격을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당분간 공공화장실을 가지 못했습니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를 결정하기 전에 그곳의 화장실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게 한 지인(남자)은 “넌 그런 거에 되게 예민하구나.”라고 했었지요.


예민하다? 예민한 나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요? 저는 이 말이 내내 의아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워진 존재’를 ‘없는 존재’ 혹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의 언어였습니다. 자신의 세상과 상대의 세상을 분리시키는, 자신이 선 땅에서 안전을 느끼며 살아온 사람의 언어였습니다. 글쎄요. 저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 자신이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존재라는 절절한 깨달음, 그것이 저의 공포이자 나라는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소.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오.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312-313쪽)


가장 사정이 나빠진 여자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다는 저 말을 한 사람이 ‘사령관’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군인의 언어를 내면화하고 인권을, 평등을 번번이 ‘다음에’ 논의하자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그 자신은 전혀 사정이 나빠지지 않은 기득권자이자 남자라는 점이며,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사정이 나빠진 여자에게 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녀 이야기』의 ‘시녀’들, 스스로를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죽은 것도 아닌데 죽은 여자들 말입니다.


전쟁과 환경오염은 인류에게 지옥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더 심한 지옥을 선물했습니다. ‘맨하탄 대청소’라고 부른 사건(“빛나는 은색 비키니 속옷, 젖꼭지 부위에 빨간 하트 모양이 붙어 있는 속이 비치는 브래지어들”을 소각하고, 그곳에서 물건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공개 속죄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을 지나면서 여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경제권을 박탈당하고, 자유를 완전히 빼앗깁니다. 세상에 할머니들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시체들을 방치해 둔 도시 게토를 청소하느라 ‘콜로니’의 여자들은 보호 장구도 없이 “피부가 고무장갑처럼 벗겨져 나”가는 꼴을 당해야 하고요. 아기를 낳은 적이 있는, 가능성 있는 여자들(!)만이 엄선된 ‘시녀’가 됩니다. 기회는 세 번. 시녀들에게 이름은 없습니다. 이들은 소유격 이름으로만 불리며(‘오브프레드(offred)’, ‘오브글렌(ofglen)’) 오직 출산을 위한 역할만을 부여받습니다.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이 책을 펼쳤는지 저는 내내 몸을 떨었습니다. 권력이 귀해지니 하찮은 권력마저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 여자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의 말들, 지극한 것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상기하는 일과 사라진 존재들을 궁금해 하는 일, 이 모든 것이 뒤엉켜서 다소간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이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가상 세계를 그린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만난 겁니다. 그것은 순전한 우연이자, 행운이었지요. 고맙게도 작가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저(같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트럼프의 세계, 혐오가 넘치는 세계에서 그렇지만 “희망의 행동(an act of hope)”을 하며 살아남으라고 말입니다. 희망의 행동, 그것은 바로 기록하기였습니다. 로빈슨 크루소, 피프스, 안나 프랭크처럼 세상의 증인이 되어 훗날을 위해 기록하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제야 저는 가없는 속울음을 그치고 중얼거렸습니다. 영영 이름을 알 수 없는 ‘시녀’, ‘오브프레드’가 한 다음의 말을. 그 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오래오래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절대로 그리 순순히 내주지 않을 테다.”(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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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56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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