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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Oct 16. 2017

세상에, 정애들

앙꼬, 『나쁜 친구』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살면서 잠깐, 누구나 미끄러집니다. 정도 차이일 뿐 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때. 넘어져 울 것인가 씩씩하게 털고 일어날 것인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일어날 수 있다, 일어나야 한다, 너를 구하는 건 오직 너 자신뿐이다, 라고요. 저는 그 흔한 말이 무섭습니다. 어떤 실수는 삶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돌이킬 수 없을 만한 실수도 돌이키는 풍요를 갖고 태어나고, 아닌 사람은 또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털고 일어나려는 노력조차 어떤 이에겐 삶을 유지하는 만큼이나 강력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불평등입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이라는 평등의 정의가 과연 인간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때때로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는 바람이지요. 가족 안에서조차 평등은 결코 실현된 적이 없으니까요. 사회 최소 단위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권력의 폭력은 한 방울 잉크처럼 사회로 번지고, 작은 권력을 학습한 인간은 권력 바깥의 한기에 몸 떠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은 다시 가해할 뿐입니다. 너무 자주 봅니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오늘도 딸을 피 터지게 팼습니다. ‘머리통이 다 찢어져버렸’습니다. 외박을 했으므로, 담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딸은 맞을 이유가 됐습니다. 열여섯 살이던 딸은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났고, 일진이던 그 친구와 가출을 합니다. 앙꼬의 만화 『나쁜 친구』의 주인공 진주와 친구 정애는 그때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이들에게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민짜’가 아니라고 속여 주점에 나가고, 돈을 벌고, 나쁜 남자들을 만납니다. 두려운 순간들. 그러나 주인을 속여 투숙한 모텔에서, 진주와 정애는 진정한 자유를 느낍니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벼랑 끝에서? 야생의 현장에서 진주와 정애의 미끄러짐에 가장 적극적으로 공모한 사람들은 ‘나쁜 친구’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공모자는 다름 아닌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성이자 미성년자인 이들을 착취하고, 서둘러 깨뜨립니다. 드물게 한 사람, 이들에게 손 내민 어른은 역설적이게도 주점 사장뿐입니다. 그는 진주에게 돈 6만원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만 할 때 집을 나왔어. 그리고 그후로 계속 이렇게 살고 있잖아. 오늘은 언니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그냥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이런 데 오면 안 된다.(64쪽)


삶은 고약하고 고약합니다. 이들의 짧은 가출이 끝나고, 진주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최소한 엄마만큼은 더 이상 진주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달라진 걸까요. 그러나 정애는, 그러니까 정애는 달랐습니다. 진주에게는 ‘그 난리를 쳐도 혼내줄 엄마아빠’가 있었지만 정애는 엄마의 이혼 통보에 칼 까지 휘두르며 폭행하는 아빠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정애는 중학교 졸업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부모의 보호가 없던 정애, 어른이 아니었던 정애, 여성이었던 정애, 가난했던 정애. 세상은 그런 정애들에게 손 내밀어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곳에 있었느냐고

그러니까 무서운 겁니다. 누가 정애에게 감히 너를 구하는 건 오직 너라고 말을 하는가. 아빠의, 남자친구의, 돈의, 사회의 폭력에 길들여진 정애에게 어느 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손가락질 하는가. 감히 누가, 정애를 맞을 만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하는가. 이런 질문이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해도 되는 사람은, 그래서 무시해도 되는 사람은 언제나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약자들 앞에서, 가난하고 학벌이 낮은 사람들, 특히 그런 처지의 여성들 앞에서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지웁니다. 왜 그런 곳에 있었느냐고, 왜 맞고 있었느냐고, 왜 탈출하지 않았느냐고, 왜 바꿀 용기를 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정애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지 정애에게 필요한 것은 떨어진 곳에서 잡고 올라올 수 있는 사다리입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울타리입니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매트리스입니다. 정애를 지적하는 손가락이 아니라.

당연하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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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58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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