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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Dec 28. 2016

계속되는 삶

케이트 윌헬름,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막 내린 커피에 코를 박고

매순간 낭패감이 듭니다. 염치 없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염치 없는 말을 들으니 머리는 물론 몸 구석구석이 시끄럽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혼란스러울수록 간절해지는 단어는 역설적이게도 활력이다, 생각합니다. 살아 움직이는(活) 힘(力). 시끄럽고, 앞 다퉈 화를 토해내는 공간 안에서 나를 지키는 것은 침묵도, 냉소도 아니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무방비로 얻어맞을 때, 지친 마음을 회복하게 하는 것은 오직 활력, 생의 의지입니다. 때때로 지독히 우울해지기 때문에, 늘 그렇게 혼란에 잠식당하기 십상이라 저는 열심히 활력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씩씩함이라 해도 좋을 테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내 일상을 활력 있게 만드는지 따져보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해집니다. 아직 답하지 못한 업무 메일보다, 삑삑거리는 전자렌지에서 냉동밥을 꺼내는 일보다, 십 분 단위로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일보다 단연 중요해집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어떻게 나를 돌보며 이 삶을 가꿔야 할지 더 치열하게 곱씹을 필요가 생깁니다. 막 내린 커피에 코를 박고 있다든지 빳빳하게 잘 마른 수건을 각 잡아 갠다든지 화분의 초록을 응시한다든지 뜨거운 물로 샤워한 후 차가운 맥주를 마신다든지. 또는 사두고 읽지 않았던 소설을 꺼내드는 일. 그것이 나의 일입니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지켜내는 작은 약속

그 세계는 파괴되었습니다. 가뭄이 길어지고, 큰 홍수가 나고, 새로운 질병이 퍼지고. 세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더러운 공기, 방사선 오염, 곡식에 퍼진 마름병, 기근... 자연 마저 더 이상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죽어간 사람들보다 조금 앞서 준비한 극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습니다. 파괴된 세상의 생존자들, 이 슬픈 자들은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고 마침내 인간 복제에 성공합니다. 내 얼굴을 한 사람들, 눈앞에서 죽은 연인의 얼굴을 한 사람들, 자신이고 연인이면서 동시에 어느 누구도 아닌 사람들, 그들의 삶.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내내 서럽습니다. 이 소설은 깊은 겨울 해질 무렵에 썼을 법한 글들 같아요. 문명의 파괴, 인간 복제, 사회 구성, 개인의 가능성 등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밑바닥에 깔린 차가운 쓸쓸함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잠시 창밖에 눈을 던집니다. 삶이 서러운 것이라면 다른 세계의 삶이라고 서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케이트 윌헬름이라는 멋진 작가가 그려낸 세계의 그 담담함,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별 다르게 소리 낼 필요조차 없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 앞에서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서러움에는 아름다움이, 생의 활력이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지켜내는 작은 약속, 이별의 순간 내어주는 따뜻한 미소, 가진 것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 사람의 확고한 선언, 그리고 읽은 사람만이 알게 되는 마지막 문장의 안도감.  


“왜 그런 표정으로 웃어?” 린다가 물었다.
“집에 돌아온 것이 기뻐서 그래. 나도 외로웠거든.” 마크는 사실을 모두 말하지 않았다. 그가 미소 지은 또 다른 이유는 린다에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모든 아이들은 서로 달랐다.(363쪽)


이럴 때일수록

지치고 어려운 시절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계속되어야 할 것은 오직 삶입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세계은 조금 캄캄하고 거칠거칠해서 여기저기가 따갑지요. 그렇다 해도 이 세계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삶의 정체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응원이 됩니다. 저는 이 멋진 소설 덕분에 이럴 때일수록 애를 써 좋아하는 사소한 일들을 해나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쌓인 먼지를 떨어내고 잠시라도 이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일에 다시 맞서 싸우자고, 그리하여 반드시 다시 이 소중한 시간을 누리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서러움 안에 아름다움이 있듯 싸우는 힘과 일상을 유지하는 힘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저는 이 소설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어느 한쪽도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시간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끝내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영역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선언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진실일 겁니다. 요즘 같은 때에 이 한 권의 소설은 거의 나를 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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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46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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