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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an 03. 2017

여자가 죽고 있다

『드러누운 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집 안쪽을 점거한 뭔가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azar)의 짧은 단편 「점거당한 집」은 저택에 사는 어느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집을 좋아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느 날 집 안에서 갑자기 들린 소리(위협) 때문에 남매가 집을 잃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소리 때문에 집을 잃다니? 맞습니다. 이 남매가 가족들의 추억이 곳곳에 남아있고, 아끼던 물건들이 있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단 하나의 공간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단지 정체 모를 어떤 ‘소리’만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복도 문을 잠갔어. 뭔가가 집 안쪽을 점거했거든.”
(중략)
“그렇다면 우리는 이쪽에서만 살아야겠네.”(『드러누운 밤』수록 「점거당한 집」, 14~15쪽)


“처음 며칠 동안은 몹시 힘들었”습니다. 무슨 소리 때문에 간단히 집 한 쪽을 잃은 남매는 점거당한 곳에 있는 “양탄자와 겨울철에 신던 슬리퍼를 아쉬워”하고, “두송목 파이프가 없어 유감”을 느끼고, 서글프게 “여기에 없구나.”라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집 안쪽을 점거한 뭔가에게 넘겨준 곳에 있는 것들은 이제 남매의 것이 아니니까요. 이들은 “차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없이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다시 소리가 들리고, 남매는 집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 나옵니다.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밤 11시였죠. 남매는 그저 거리로 나갔습니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야기

저는 이 이야기에서 공간을 잃은 여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미심쩍음과 거기서 비롯된 공포에 일상의 공간을 내어주는 삶을 생각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공포에 지고 마는 삶을, 애처롭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난 여자들은 직접 겪은 성추행, 성폭력 경험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여자들은 부모나 조부모에게 남자 형제와 비교 당하며 차별받은 경험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명동 한 복판에서도 심지어 집 안에 있으면서도 공포를 느끼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인데도 그렇습니다.

한편 여자들은 사회적 성취를 위해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해도, 남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아직도 있습니다)에 진출을 해도 질타를 받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된 폭력에 대항하다 남자를 죽이거나 자신이 죽게 되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는 질타를 받습니다. 늦은 시간에 왜 거기 있었느냐고,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느냐고, 네가 유혹한 게 아니냐고, 그럴 줄 몰랐느냐고 질타를 받습니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을 죽인 아내에게는 “왜 이혼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고, 아내를 때리다가 결국 살해까지 한 남편과 그의 손에 죽은 아내에게는 “신고나 이혼을 하지 않고 가정폭력을 인내해온 여성의 처신은 곧 헌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298쪽)


공간을 회복하는 노력

늘 ‘밤길 조심하라’라는 말을 들었던 이유는 여자에게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밤길은 여성의 공간이 아니고, 술집은, 공용화장실은 모두 여성의 공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게 되듯 회사도, 집도, 시장도, 대낮의 거리도 여성의 공간은 아닙니다. 여성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저 어떤 소리 때문에 여자가 집을 잃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저 “생각 없이 살”면서?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2015년,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한 여자는 최소 91명,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자는 최소 95명이었습니다. 아직도 ‘여자’라서 죽은 사건들을 희미한 단어로 지우기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여자들과 살아남은 모든 여자들을 위협하는 짓일 겁니다. 더 이상 공간에서 여자를 내몰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공간을 회복하는 노력을 계속 할 것입니다. 이는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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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34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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