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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an 09. 2017

기득권을 인식하기

윌리엄 피터스, 『푸른 눈, 갈색 눈』

우리끼리 싸워야 한다는 것

싫어하는 것만 많아지고, 많은 것에 투덜대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그러기는 쉽다’입니다. 가령 이런 것. 편의점 계산대 줄이 너무 길다, 버스 기사가 난폭 운전을 한다, 주문한 음식이 늦게 나온다. 이때 저는 알바 한 명으로 수많은 업무를 감당하려는 편의점을 욕하고, 버스 기사의 과도한 노동 강도에 불만을 던지고,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 식당 주인을 원망합니다. 식당 건물주, 편의점 체인 사업자, 버스 회사를 욕하면서 그럽니다. 하지만 역시 ‘그러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순간 투덜댈 뿐, 근본적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저 버스가 제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를 데려다주면 좋겠고, 배고픔을 달랠 음식이 너무 늦지 않게 나오면 좋겠고, 빨리 볼 일을 보고 편의점을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우리끼리 싸워야 한다는 것은. 그리고 나의 기득권을 인식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이 기득권을 내려놓기 위해 얼마나 큰 각오와 사소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 나는 불편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태도는 과연 공정한가? 비판의 시선을 바로 자신에게 가져오는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차별하지 않는다, 혐오하지 않는다, 누구나의 인권은 소중하다, 지극히 당연한 이 말들이 굳건히 자리한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그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우리는 아직 차별에 내몰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일은 그렇게 빨리 시작

어느 조용한 마을, 미국 한 작은 교실의 제인 엘리어트는 이틀 간 자신의 학생들과 차별에 관한 실험을 하기로 합니다. 푸른 눈을 가진 학생과 갈색 눈을 가진 학생으로 그룹을 나누어 하루는 푸른 눈이, 하루는 갈색 눈이 열등하다는 가정을 하고 생활하기로 합니다. 『푸른 눈, 갈색 눈』을 꺼내들었을 때 뭔가가 부서지는 느낌을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일은 그렇게 빨리 시작”(24쪽)됩니다. 열등 그룹 학생들은 곧바로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습니다. 단 하루 만에 우월 그룹의 일부 학생들은 “‘열등한’ 그룹의 구성원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하고, 특별히 못된 방법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야만적인 기쁨을 느꼈”(43-44쪽)습니다. 이들이 단지 어린 학생들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명백한 기득권을 확인했을 때, 나약한 인간이 집단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빠르게 가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매일 수도 없이 목격합니다. 구조 안에서, 인간은 언제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입니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시달리는 편의점주는 알바생의 시급을 최저시급에 꼭 맞춰 주면서 감정 노동까지 시키는, 그런 식이지요. 이때에도 저는 언제나 투덜이라 ‘저건 나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뿐 뒤돌아 가던 길을 갑니다. 피해자는 제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푸른 눈, 갈색 눈』은 차별의 근거라고 내세우는 그 어떤 것도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 모두가 언제든지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제 3의 영역에서 가해자의 차별을 묵시함으로써 함께 가해할 수 있다는 사실, 대부분이 차별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들을 명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 소망은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 발언이 그들의 눈앞에서 행해질 때 그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들 주변에선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거요.(166쪽)


얼마나 반가웠던지

책을 덮고나면 어떤 소망이 생깁니다. 저는 이런 선생님을 모두가 일찍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차별의 허약한 근거를 모두가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겁니다. 그리고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선생님을 뉴스로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사회가 바뀌는 중이라는 청신호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혐오 표현이 왜 나쁜지를 여러 자료를 통해 가르치고 아이들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보수단체, 일부 남성들의 항의로 결국 이 ‘페미니즘 북클럽’은 자진해산했습니다. 선생님은 병가를 내야 했습니다. 인신공격과 사생활 침해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쪽에 있는 것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만일 나의 학창시절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있었다면 앞서 언급한 일상의 작은 차별 앞에서 저는 외면과 침묵으로 일관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현재 한국 사회의 폭력성도 보다 덜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려면 어떤 감수가 필요하다는 사실, 그것은 행동을 저해합니다. 비난을 감수해야 하고, 평온한 삶을 포기하는 일을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무척이나 어렵고, 꽤 애를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겁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을 응원하고, 혐오의 목소리에 속지 않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것은 진실이고, 저쪽에 있는 것은 차별과 혐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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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42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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