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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Sun Jan 20. 2017

세상의 많은 ‘카타리나 블룸’들

『카나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적을 만들다』

평범한 이웃집 여자

평범하고 성실한 여자가 있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홀로서기에 성공해 지금은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평범한’ 이웃집 여자입니다. 꼼꼼하게 일을 해내 주변의 신망도 두텁습니다. 가정부 일을 하며 만난 변호사 부부의 도움으로 대출을 받아 아파트도 구했습니다. 여자는 근검절약하며 빚을 갚아 나갑니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여자는 그러나 하루 아침에 “창녀”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위장한 공산주의자가 되고, 여자의 아파트와 자동차는 성실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부의 축적으로 의심 받습니다.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은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범죄자와의 정사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로 섹스 광고의 주요 타깃이 됩니다. 여자의 모든 것이 그렇게 변질되는 데는 세상에, 하루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여자는 축제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납니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데 안타깝게도 그 남자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는 범죄자였던 겁니다. 남자를 놓친 경찰은 곧바로 여자 역시 공범이라는 데 혐의를 두고 수사를 진행하지요. 언론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합니다. 이 여자의 정체를 따집니다. 여자의 아파트는 “모의의 본부”인가? 여자가 훔친 돈의 “분배에 관여”했나? 언론은 한참 전에 이혼한 여자의 남편을 찾아가고(당연히 부정적인 코멘트가 나올 것이므로), 병원에 입원중인 여자의 (사이가 좋지 않은)어머니와 인터뷰를 시도합니다. 주변인에게서 얻은 평판을 교묘히 왜곡합니다.

이제 여자는 자신이 단단히 딛고 섰던 일상이 도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는 ‘명예’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여자는 평범한 이웃집 여자였습니다.


진실과 기사 틈에 있는 무수한 굴절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누군가 연상된다면 오해 마시길. 이것은 하인리히 뵐 소설 『카나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은 언론이 펜으로 한 인간을 얼마나 잔혹하게 사냥할 수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그립니다. 사실과 보도 내용을 꼼꼼히 비교하는데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기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지, 진실과 기사 틈에 있는 무수한 굴절을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자세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카타리나 블룸’이 있는지.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의도적인 폭력에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 오도된 정보에 매장 당하는 힘 없는 개인들. 혹 여러분은 깨어있다면, 교양을 갖추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면, 모나지 않게 지금처럼 평범하게 산다면 여러분 자신이 ‘카탈리나 블룸’이 될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나 ‘카타리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는 점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정신 없이 보도되고 강력하게 전달되는 순간적인 소식에 매몰되지 않고 층층이 쌓여 아래에 묻힌 여러 측면을 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인공의 벽

얼마 전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언론’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모두 언론의 중요성을 피력합니다. 우리 사회 언론의 일그러진 부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끝내 ‘어떤 언론이 필요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어쩌면 답을 알고 있는데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인터뷰집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에서 “언론은 광고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근본적 한계를 갖”(199쪽)는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언론은 “민간 기업들에 시청자를 파는 민간 기업”(199쪽)입니다. 홍보, 광고, 텔레비전 등의 대중문화를 이용해 기업은 “인공의 벽을 세우고 대중을 그 벽 안에 가둬 격리시켜려”(31쪽) 한다고 말합니다. 언론 카르텔 안에 저당 잡힌 소비재, 그것이 대중입니다.


터키색 양말을 신은 판사

시선을 조금 넓혀보겠습니다.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사건’ 중 오늘 저녁 뉴스에 보도된 소식은 얼마나 한정적인가요. 어떤 소식을 먼저 내보내고 어떤 소식을 자세하게 전할지는 언론사의 몫입니다. 만일 언론사 광고주, 언론사의 모기업, 혹은 언론사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뉴스가 있다면? 동시에 살인사건, 성폭행 사건, 어느 악플러의 피소 사건 등이 일어난다면? 뉴스는 살인 용의자의 사생활을 털고 한 인간을 악마화 함으로써 다른 뉴스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을까요.


움베르토 에코는 “언론이 정작 입을 떼야 하는 다른 뉴스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을 알”리고 있다고 말합니다(『적을 만들다』,185쪽). 언젠가 이탈리아의 한 언론이 터키색 양말을 신은 판사에 대해 3일 동안 보도한 사례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고의적인 검열뿐 아니라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숙명적으로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검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189쪽)고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촘스키 역시 지식인, 언론이 “대중을 조절해서 동의를 조작”해낸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바쁜 세상입니다. 진실을 따져보는 일, 쉽지 않은 노력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누군가는 더욱 편안하고 안전하게 대중의 사유(思惟)를 사유(私有)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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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 102호에 실린 글을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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