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은 문득, 갑자기, 난데없이
십수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건조한 단순기억이라기 보단
그 날의 기분과 생각이랄까.
권피함과 호기심이 가득한 나날을 보내던
교복차림의 학생시절 기억이다.
그때만 해도 한 반에 얼추 다 큰 머릿수가 와글와글,
전교생을 합치면 나름대로 큰 운동장이 빽빽했다.
반친구들은 대체로 시끄러웠다.
말이 많았다기 보단 오가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은 쉽게 자극되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올랐다가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그 시끄럽던 아이들 중엔 나처럼 분위기에 휩쓸려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고 일단 와하하,거리거나
쒸익쒸익,거리거던 아이도 있었으리라.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묻어갔을 거다.
버거운 감정노동으로부터 오는
찐득한 권태감이 목아래와 가슴 윗켠에 쌓일 때면
일말의 안광조차 들지 않는 눈동자의 나는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을 하곤 했다.
축축한 향을 풍기는 어슴푸레한 새벽,
누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가만가만 씻고 준비를 해 집을 나서는 일.
아파트 상가의 마켓에 물류차가 들어오던 시간이
6시었으니 집을 나선 시간도 그 즈음이었겠다.
그 날에 가장 처음 들어온 포켓몬빵을 사서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낮과는 아주 딴판인 차분한 학교를 향해 걸었다.
당시 가장 먼저 온 학생은 교무실에 들러
교실 키가 대롱대롱 달린 출석부를 회수해야 했다.
색이 바랜 열쇠로 더듬더듬 미닫이 앞문을 열면
때때로 숨을 조이던 교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뻔뻔한 안락함을 뽐내고 있었다.
짜릿하다 못해 저릿한 이질감을 헤엄쳐
창가 내 자리로 가 앉아 관자놀이를 괴고는
잘못 만든 티라미수같은 멀건한 운동장을
가느다란 눈으로 내려다 보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으면 하나 둘씩 까만 점들이
뽀르르 교문을 통과해
뽀르르 운동장을 지나는 게 보인다.
교실의 적막을 깨는 누군가가 생기기 전까지
그 점들이 점점 커지는 걸 구경한다.
이 행위는 지금 이 장면의 주인공이 나라고
박박 우기는 자애적 행위이다.
나로부터 시작된 시선과 나로 이루어진 공간에
심지어 조연도 아닌 기타 등등을 들이는 행위.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교실에 친구가 들어오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
내가 준비가 된 상태에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나름의 치유기제와 개인 공간으로의 침범을 허용하는
상징적 의미였던 것이다.
고요하고 서늘하고 스산하던 나는
친구를 맞이하자 채 1초도 걸리지 않아
"원래 저런" 명랑하고 활달한
왈가닥 군중 속 1인이 된다.
속은 흐물흐물 흐트러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연약한 껍질에라도 종속된 날계란같달까.
늘 생각했다.
과연 어느 모습이 진짜 "나"일까.
모두가 나처럼 양면의 달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린 날의 나를 괴롭히던 이 생각은
어른이 된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이것도 나, 저것도 나라는 걸 인정하고
오히려 대견해했더니 쑥쓰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나의 나약한 본질은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이다.
매번 내 껍데기를 튼튼하게 만든다.
줏대없이 휘말린다고 생각한 순간들을 포장하자면
난 그저 워낙에 다채로운 아이었던 거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생각 하나로부터 파생되어
여지껏 삶과 자신을 빗대어 고찰해오고 있다.
아직도 스스로와 친해지는 중이고
앞으로도 알아갈 것이 많다.
나로 사는 건 참 애달프고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