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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무 Aug 02. 2020

먼 나라 동물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곳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이 책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메이너 농장에 살고 있는 동물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노동력, 자식,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도 주인이 가져간다. 어느 날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동물의 삶에 대해 연설한다. 메이슨의 연설은 '동물주의'라는 이념을 만들고, 돼지들은 이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다. 그러던 중 주인에게 화가 난 동물들이 우발적으로 주인을 내쫓게 되고, 동물들은 함께 생산하고 나눠갖는 '동물농장'을 만든다. 처음에 동물들은 인간에게 종속되어있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돼지 무리가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농장을 마음대로 관리하고 동물들을 부리기 시작한다. 동물들의 삶은 인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지고, 어쩌면 더 나빠지게 된다.



  고전은 왜 고전인가. 그 책이 쓰였던 시공간을 벗어나 있어도 여전히 통하는 진리, 진실 혹은 진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 역시 고전문학으로, 청소년이 읽어야 할 필독서 중 하나였다. 필독서를 많이 읽을수록 더 똑똑해진다고 생각했던 청소년의 나는 이 책을 읽고,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책이군. 책 한 권 클리어했다.' 정도의 소감을 가졌다. 그 이상의 깊은 인상은 없었다. 어쩐 일인지 출판업계가 이 케케묵은 <동물농장>에 마케팅을 쏟아부으면서 서점에서 이 책을 자주 마주쳤고 다시 읽게 되었다.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책 구석구석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책은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로운 것을 이루어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이다. 가끔 나는 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생물처럼 유전자를 갖고 있어 스스로를 복제하여 종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동물농장에서 다루는 사건이야말로 인간 사회에서 끈질기게 생존해온 종이다.





▪︎편의상 '동물들'은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을 가리킨다.



"You either die a hero, or you live long enough to see yourself become the villain" - 영화 <다크 나이트> 중



  모두가 힘을 합쳐 기득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 승리의 주역에게는 세 가지 길이 주어진다. 일찍 죽어 영웅으로 기억되거나, 이후에 온갖 일에 휘말리며 명예를 잃거나, 희박한 확률로 죽는 날까지 오랫동안 존경받는 것이다. 불행히도 현실에서 영웅은 드문데 처음에는 영웅으로 추대되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기 때문이다. 영웅 후보자들은 자신이 외쳤던 신념을 잃어버리거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결국 자신이 타도했던 대상과 경계가 흐릿해지고, 새로운 영웅 후보자에 의해 타도된다. '정'을 부정한 '반'이 '정'과 합쳐져 '합'이 된 후 다시 '정'이 된다는 진리는 모든 시대와 나라를 꿰뚫을 정도로 날카롭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추락한 영웅이 아니다.


  <동물농장>은 혁명을 이끌었던 돼지 집단이 부패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동물들이 너무나 무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돼지 나폴레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돼지를 제외한 동물들을 착취한다. 동물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금방 나폴레옹의 말에 수긍해버린다. 그들은 너무나 멍청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글을 몰라 법문을 읽지 못하고, 쉽게 선동되고, 돼지들의 계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당한 현실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다.


  '무지몽매한 대중'이라는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은 지금도 만연하다. "국민 평균 5등급", "민중은 개, 돼지", "쟤네랑 나랑 똑같은 한 표라니." 등 인터넷에서 밈처럼 쓰이는 말들이 이를 방증한다. (이 말의 발화자가 자신이 멸시하는 대중과 자신 사이에 어떤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흥미롭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중의 선택이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인 일이 많았으므로 대중에 대한 경멸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물농장>의 동물들을,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대중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풍차를 만들기 위해 돌을 나르지 않는 돼지만이 풍차 설계도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일 수 있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풍차를 만든다. 그들은 풍차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과연 풍차 만들기가 성공할 수 있는지, 풍차가 만들어지면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풍차에 대해 알거나, 혹은 알려고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동물은 돼지뿐이다. 돼지는 풍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에서 면제된다. 그들은 좀 더 거시적인 일, 농장 전체를 관리하고 지시하는 일을 맡는다. 풍차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풍차를 만들고 있다고 동물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돼지가 풍차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른 동물들보다 선천적인 지능이 좀 더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골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무엇에 집중할 수 있느냐가 차이를 만든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풍차를 공부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풍차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알파벳을 전부 읽지는 못해도 a, b, c, d까지는 알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책에서는 동물이기 때문에 선천적인 지능 차이가 큰 것으로 그려지지만, 현실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지능 차이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한가?', '무엇이 옳은가?',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가?'와 같은 문제는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와 의견을 수집한 후 유기적으로 분석하고 심도 있게 해석해야 한다. 이런 일을 일반 대중이 혼자서 알아서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동물들이 저마다 농장에서 해야 하는 일(알을 낳고 품기, 젖을 짜기, 잡초 뽑기, 농작물 수확하기, 그리고 풍차 만들기)이 있듯이, 사람들도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봉양해야 한다. 필요한 모든 정보를 직접 찾아 파악할 시간이 없으므로,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요약된 자료를 참고한다. 그러나 미디어는 간결함과 강렬함이 특징이기 때문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있는 그대로 다 펼쳐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세금으로 정치인을 고용한다. 그들의 임무는 엄청나게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찾고,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하여 설득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각자 내린 결론을 미디어가 받아 적고 우리는 그중에서 선택한다. 말하자면 객관식 시험인 것이다. 어쩌면 정답은 선택지에 없을 수도 있고, 선택지가 하나만 달랑 나와있었을 수도 있고,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정답이 있었지만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출제자에게 문제를 내는 것은 본업이지만 응시자에게 문제를 푸는 것은 부업이 된다. 부업을 잘 못한 것보다 본업을 잘 못한 것이 더욱 큰 책임이고, 잘못이며, 비판받아야 할 문제이다. 대중이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간결한 설명인 데다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대중이다. 남들의 무지몽매함은 잘 보이지만, 내가 무지몽매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마주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남을 마음껏 조롱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같은 입장이고, 이것을 이해할 때 좀 더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말이 원하는 것은 초원일까, 각설탕일까?



  모두가 동의하는 변화는 드물다. 어떤 집단을 위한 변화의 움직임이라 해도 그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고, 어떤 지위나 소속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생각을 가진다는 접근은 편협하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하기 때문에 갈등은 늘 복잡하게 발생한다.


  <동물농장>에서 흰색 암말 몰리는 동물주의에 관심이 없다. 인간이 자신을 지배하든 착취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관심사는 각설탕이고, 각설탕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에게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은 각설탕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아니다. 이런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혁명이 일어났고 농장은 동물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몰리는 동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동의 일에 참여하지 않다가 어느 날 농장에서 사라진다. 그녀는 인간 주인을 찾아가 댕기를 달고 각설탕을 먹는 삶을 선택했고, 그 삶에 만족해한다.


  어떤 집단을 위한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할 때, 이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는 그 집단 내부에도 존재한다. 이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일으킨다. 존재 자체가 변화의 명분을 깎아내려 집단의 약점이 되므로 분노를 산다. 변화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운동이 성공했을 때 얻는 이익은 나눠갖기 때문에 얄밉다. 무엇이 저를 위해 정말로 좋은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한심하다. 그래서 내부의 적은 때로 외부의 적보다 더 가차 없이 공격당한다.


  <동물농장>에서 내부의 적을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이상적이다. 동물들은 몰리에게 동물주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몰리가 끝내 납득하지 못하고 농장을 빠져나가 다른 주인을 모시자, 동물들은 더 이상 몰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를 억지로 끌고 와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그녀의 선택을 인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방향에 내부자들이 동의해주지 않는 것은 굉장히 절망스러운 일이다. 같은 처지임에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의아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설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동의하지 않는 방향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야기를 들을 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 싸움은 이따금 무자비하지만, 싸움을 함께 할 친구를 고르는 일에는 자비와 관용을 보여야 한다. 






  <동물농장>은 어른이 되어 읽으면 더 재밌는 책, 읽으면서 보고 들었던 사건과 인물들이 떠오르는 책, 얇아서 빠르게 읽을 수 있는데 생각할 거리는 많은 가성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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