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징비록>을 읽고.
가뜩이나 우울한 요즘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면, 이 책은 읽지 마시라. 지루한 일상 속에서 재밌고 신나는 이야기를 찾는 분들도 이 책을 읽지 마시라. 이 책은 읽는 내내 답답하고 짜증 난다.
이 책은 1543년을 조선과 일본, 유럽이 어떻게 다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해로 이야기한다. 1543년 유럽에서는 천동설이 파괴되고 인간은 대항해를 시작했다. 1543년 일본은 유럽인을 통해 총을 알게 되었다. 이 총은 짧은 시간 안에 대량 생산되어 전국에 퍼졌다. 1543년 조선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성리학 교육기관인 서원이 설립되었다! 이 서원은 학연, 지연, 진영논리로 점철된 정치분열이라는 독초가 자라는 토양이 되었다.
*이 글에서 서술되는 역사적 사실은 <대한민국 징비록>의 내용을 참고했습니다.
대마도 사람 평장친이 조선에서 자신을 받아주면 총 제조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자 명종은 이렇게 말한다.
"어진 장수가 있어 잘 조치한다면 적들이 멋대로 날뛰지는 못할 일이다."
적의 발전된 무기에 대한 지도자의 대답이 너무도 태평하다. 명종이 죽고 나서 총으로 무장한 일본이 조선 땅을 침략했다. 어진 장수인 이순신 장군이 적들을 물리쳤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일본의 총에 죽어나갔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명종보다는 총에 관심이 있었다. 직접 역설계를 통해 총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총을 만든 군주에 대해 신하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앞뒤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성리학을 숭상하는 관리자들은 지도자가 무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조는 전쟁 통에도 신하들과 함께 성리학 토론을 하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신하들의 충언은 이러하다.
"비록 난리를 당했더라도 멈추거나 없애서 학문의 공에 쉼이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지도자 한 명의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지배계층이 공유하던 신념은 도덕정치였고, 부국강병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도덕적이기는 했는가? 안타깝게도 조선은 그 끝을 향해가면 갈수록 부정부패로 썩어갔다. 실리적인 유능함이 없다면 도덕성이라도 지켰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조선은 사농공상의 질서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공업과 상업을 천시했고, 이 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제대로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통제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의 과학과 경제는 퇴보해갔다. 기술 발전은 경제를 성장시키고, 경제 성장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순환 고리가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그 반대의 순환을 선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은이다.
은을 캐고 정제하려면 과학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은은 경제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라가 은으로 부를 쌓으면 또 다른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은은 어떤 역사를 거쳤을까?
청나라에 바쳐야 하는 조공 중에는 은이 있었다. 이것을 바치지 않기 위해 조선은 아예 은광을 아예 폐쇄해버렸다. 은과 관련된 기술은 조선에서 그 쓸모를 펼칠 수 없었다. 조선의 기술자들은 일본에 은 제련법을 전수했다. 일본의 은 생산량은 증가했고, 은을 기반으로 한 교역으로 일본은 부강해졌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하는 조선은 공업과 상업을 쓸데없는 사치 정도로 여겼다. 책을 읽는 선비와, 그 선비들이 먹을 것을 생산하는 농민만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업과 상업을 배제한 국가는 검소함이 아니라 빈곤함으로 치닫고 있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일본으로 향하다가 난파했다. 하멜을 비롯한 선원들은 표류 끝에 제주도에 도착했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신문물과 신지식을 가진 외국인의 방문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들은 무려 13년 간 풀베기, 땔감 베어 오기 같은 단순노동과 양반집 구경거리 되기, 구걸하기 같은 수치스러운 일들을 겪은 후 결국 탈출해버린다.
1600년 4월 윌리엄 애덤스는 리프데호를 타고 항해하다가 표류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 이들은 일본에 종교, 항해,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였다. 일본은 애덤스에게 유럽식 선박 건조를 맡겼고, 애덤스는 훌륭하게 해냈다. 그는 통상과 외교 고문으로 일했고, 이후 귀국을 요청하자 토지와 저택, 농노, 작위를 받는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
배척과 포용, 이것이 두 나라가 낯선 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이것이 단순히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만 발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기술, 새로운 세계질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지식이 널리 퍼지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훈민정음이 있어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금속 인쇄술도 일찍이 발달하여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것이 발명되어있었는데도, 조선의 지배층은 지식을 독점하려 했다. 지식이 곧 자신이 누리는 권력의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지식의 유통을 철저하게 국가에서 관리했다. 민간에서 책을 사고파는 것을 단속했고, 국가가 읽을 책과 읽을 사람을 정했다. 일반 백성은 이 정보유통망에서 배제되었다.
성리학을 제외한 학문은 철저히 배격당했다. 성리학자끼리도 자신이 아는 성리학이 옳다고 싸워댔다.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학문이 틀린 것이어야만 했다. 학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아니라, 상대방을 내리찍을 구실을 만들기 위한 말싸움에 불과했다. 도덕과 지식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권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조선의 시간은 진영논리 싸움에 허비됐다.
조선의 마지막 왕과 왕비라고 하면, 왠지 모를 비애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수많은 백성들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상기하면, 분노의 감정이 든다.
이 변혁의 시기에 조선의 지도자는 어리석었고, 그러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는 급급했다. 그들이 이해한 개화라고는 값비싼 신기한 물건을 사모으는 것에 그쳤다. 화려함을 좇는 허영심을 채우느라 국가의 재정은 말아먹었다. 지도자의 결단력이 필요한 때에는 신하들에게 미루거나 외국의 등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을 보였다. 그렇게 제대로 한번 반격도 못해보고 조선의 지도층은 나라를 일본에 뺏겼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감안하려 해도, 조선의 마지막 왕과 왕비가 조선의 백성을 진심으로 위했다는 것을 느낄만한 대목이 없다.
어느 정도 나라의 시스템이 안정이 된 후에는, 무능한 지도자가 있다 한들 시스템으로 나라가 어떻게든 굴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중대한 때에 무능한 지도자가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 무엇으로도 결과를 바꾸기 어렵다. 반대로 유능한 지도자는 승부를 뒤집는 결정적인 한 수가 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