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1장
제목에서 '여전히'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삶을 사랑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각 단어들에 대한 본인의 독특한 정의를 내리는데, 그 정의에 담긴 통찰이 흥미로웠다.
삶이란, 항상 하나가 되고 완전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멋대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자기 안에 담기지 않은 것으로 자라날 수는 없다. 동시에 예상할 수 없기도 하다. 가능성이 무한함과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은 될 수 없다.
사랑은 성장을 촉진하고픈 열정적인 욕망이다. 사랑은 감상도 나약함도 아니고, 정신적인 힘(인내, 이해, 용기)으로 부작용 없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행동이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며 성장을 열렬히 응원한다. 또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쉬지 않고 변화시킨다.
폭력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겠다는 특정한 목표가 있지만, 상대가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 자체에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상대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로 폭력을 합리화한다. 폭력의 수단(재산, 지위, 명성, 무기)을 키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자하고, 자기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장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일 수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일 수도, 성장하는 조직일 수도 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매료된다. 이렇게 개별적인 생명력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사랑한다.
죽음, 파괴, 질병, 타락, 해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성장과 생명력에 매력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미워한다. 그러다가 삶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실망과 분노로 죽이려고 한다. 지나치게 자녀를 통제하려는 부모나 연인을 구속하려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가만히 그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고요할 수 있는 능력, 무언가에 뛰어들 능력,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된다.
→ 고요하려면 최소한의 환경이 필요하다. 배가 고픈데 고요하게 집중할 수 있는가? 일과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 후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몰입할 수 있는가? 누군가 나를 계속 불러대서 나의 고요함을 깨버린다면? 고요할 수 있는 능력은 최소한의 고요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 고요함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지만, 고요함 이상의 것을 이루게 해주는 수단은 불필요하다.
인생의 최고는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 생명(변화하고 성장하는 것) vs 사물(변화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있는 것)
- 행복(고요함) vs 흥분(고요하지 않은 것)
- 목적(삶) vs 수단(사물)
- 사랑(상대의 본성) vs 폭력(나의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