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고.
여러 번을 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감동을 받는 영화가 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가 내게 그렇다. 어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젊은 조니 뎁의 탁월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고,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와 목소리를 지닌 줄리엣 루이스라는 배우를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극적인 사건 없이도 지루하지 않고, 섬세하게 주제를 쌓아 올리는 전개가 편안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받아들인 이 영화의 메시지가 따스하고, 나에게 치유와 위안을 준다.
한 작은 마을에 길버트 그레이프의 가족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집의 지하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초고도 비만이 되어 거실 소파에서 모든 생활을 해결한다. 총 다섯 남매이지만 장남인 첫째 형은 집을 나가버렸고, 길버트는 누나 에이미와 함께 반항기 가득한 여동생 엘렌과 지적장애를 지닌 남동생 어니를 돌본다.
어느 날 캠핑카를 타고 여행 중이던 베키는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길버트가 사는 마을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베키는 가족을 충실히 돌보는 길버트에게, 길버트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베키에게 호감을 느낀다.
What's eating Gilbert Grape?
이 영화의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이다. 자연스럽게 번역하자면,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고 있는가?" 정도 일 것 같다.
영화를 세 번째쯤 봤을 때, 이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베키가 길버트에게 사마귀의 교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암컷은 교미를 하며 수컷을 먹는데, 처음에는 머리를 씹어 먹고 교미가 모두 끝나면 남은 몸도 먹는다고 한다.
사마귀는 가족을 위한 희생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길버트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있다. 가족을 위해 늘 똑같이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을 묵묵히 견디고, 가족을 생각하느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틈도 없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고 있냐는 영화의 제목에 대한 답변은 '그들의 가족'이다. 한 가지 재미난 장면도 있는데, 어니를 씻겨야 하는 일을 하루 빼먹은 길버트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Where is your head(머리를 어디에 두고 다니니)?" 수컷 사마귀가 머리부터 뜯겨나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대사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길버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의 동생도, 누나도, 엄마도 모두 그가 더 열심히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의 이웃도 그에게 생명보험을 팔려고 하면서 "가족에 대해 생각은 해봤니? 너만 생각하지 말고 가족들도 생각 좀 해 봐."라고 말한다. 길버트는 이미 한계점에 부닥칠 만큼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길버트는 가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리고 있다. 젊은 나이임에도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무엇을 도전하지도 못한 채, 머리가 뜯겨나간 사마귀처럼 살고 있다.
We are not going anywhere.
의사들은 어니가 언제든지 가버릴 수 있다(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니는 자신을 소개할 때 "I can go anytime(난 언제든 가버릴 수 있어)."라고 반복해 말한다. 실제로 어니는 갑자기 사라져 높은 탑이나 나무를 기어오르곤 한다. 가족들은 그에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눈 앞에서 사라지지 말라고 한다.
반대로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길버트다. "잘 자."를 "잘 가."로 잘못 말한 어니에게 길버트는 "우린 아무 데도 가지 않아(We are not going anywhere)."라고 못을 박는다. 길버트는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떠날 일이 없음을 확신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가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와 애정행각을 몰래 벌였던 유부녀는 길버트를 선택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항상 거기 있을 것 같아서. 떠나지 않을 것 같아서."
길버트는 왜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가?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길버트의 엄마는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부자유로움을 몸으로 형상화한 인물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갖고 있어서 어니가 잠깐만 보이지 않아도 심하게 불안해한다. 아마도 남편의 자살과 첫째 아들의 가출이 트라우마를 남긴 듯하다. 자신이 움직일 수도 없고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불안한 그녀는 집과 한 몸이 되어 가족들이 집을 떠날 수 없게 한다.
We can go anywhere.
길버트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길버트의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다. 바닥이 언제 꺼질지 몰라 버팀목을 임시방편으로 댄 위태로운 집이다. 가족들은 이 불안정한 집에 묶여 점점 지쳐가고 서로를 원망한다.
베키는 이혼한 부모 밑에서 여기저기를 오가며 성장했다. 커서는 캠핑카를 몰며 여기저기를 떠도는 여행을 한다.
둘은 진정한 의미의 집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길버트의 경우 물리적인 집(house)은 있어도 정서적인 집(home)은 없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머물며 먹고 자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집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고 싶은 그런 공간이다. 그리고 돌아올 수 있으려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떠남의 선택권이 없는 공간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길버트에게는 집이 없는 것이다. 베키는 항상 떠돌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 집 없는 둘이 만나 사랑을 한다.
길버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베키를 엄마에게 소개한다. 그날 밤, 그녀는 용기를 내서 2층에 올라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어쩌면 다음 날은 가벼운 산책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다음 날 갑작스럽게 죽은 채로 발견된다. 어머니의 시신이 너무 무거워 바깥으로 옮길 방법이 마땅하지 않자, 길버트는 어머니의 시신을 집과 함께 태워버린다. 모두를 옭아맨 집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집이 곧 자기 자신이었던 길버트의 엄마는 끝내 집을 떠나지 못하고 집과 함께 사라진다.
이후 여동생 엘렌은 전학을 앞두고, 누나 에이미는 다른 마을에 취직을 했다. 길버트와 어니는 여전히 그 마을에 남아있다. 어니가 우리는 떠나지 않냐고 묻자, 길버트는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답한다. 이제 길버트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곳에 돌아올 베키를 기다린다. 베키는 이제 돌아갈 곳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온 베키와 길버트, 어니가 다시 만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도망간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말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어 머무는 곳도 낙원은 아니다. 떠도는 삶이 자유롭다고 하지만, 돌아갈 곳 없이 떠도는 것은 부유(浮遊) 일뿐이다. 떠날 수 없는 곳은 집이 아니다. 돌아가지 못하는 곳도 집이 아니다. 모두에게 sweet home이 있어, 긴 인생의 여정에서 지칠 때 돌아 가 따뜻한 환대를 받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