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본 후 <본즈 앤 올>을 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고, 느끼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물론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화는 메시지와 상징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풍부한 해석의 장을 마련해 사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반면 어떤 영화는 보고 듣는 감각을 충만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후자에 속한다. 섬세하고 세련되고 아름답다. 곱씹어 볼수록 아릿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감독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서 보았던 영화 <본즈 앤 올>은 전자에 속한다. '사람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사유의 재미를 주는 영화를 더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 중에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더 좋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느낌을 기대하고 봤기에 <본즈 앤 올>은 뜻밖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쓸거리는 감각보다는 사고에서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본즈 앤 올>에 대해 쓰고자 한다. 생각은 영화를 보고 나서 글을 써내려갈수록 더 깊어지지만, 감각과 감정을 최상으로 느끼려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줄거리 요약
주인공 소녀 매런은 사람을 먹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이 때문에 매런의 아버지는 매런을 데리고 여기저기로 도망 다녀야 했다. 더 이상은 매런을 감당하기 어려운 아버지는 매런이 성인이 되자 매런을 떠난다. 졸지에 혼자가 된 매런은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
매런은 세상에 사람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지만, 어머니를 찾는 여정에서 자신과 같이 사람을 먹어야 하는 다른 eater들을 만난다.
매런은 자신처럼 eater인 소년 리를 만나 동질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영화에서 eater들은 외롭다. 사람을 해치는 존재이기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기 때문이다. 매런의 식인을 막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노력 혹은 엄격한 통제 때문에 매런에게는 평범한 교우 관계도 허락되지 않았다. 매런의 어머니는 스스로의 팔을 절단내고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리는 가족이 있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방랑한다. 늙은 셜리는 아마 평생을 외롭게 살았던 탓에 다소 미쳐있다.
나는 늘 망치기만 하고, 내 곁에 오면 다들 불행해지고, 그래서 난 외톨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늘 파탄 나는 관계 때문에 외로움을 선택하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가? 그렇게 다짐하고도 또다시 사랑을 하고 싶어 하는 스스로가 싫었던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이 영화에서 eater이다.
영화에서 식인은 꽤나 명확하게 사랑에 관한 비유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간 매런이 욕망을 참지 못하고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 직전에 매런은 친구와 다정하게 누워 손가락 장난을 치는데 이 모습이 꽤나 에로틱하게 그려진다. 식인이 사랑에 대한 비유임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본즈 앤 올'은 뼈까지 남김없이 먹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영화 속에서 한 eater는 '본즈 앤 올'을 하기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몸, 마음, 열정, 매력, 에너지를 빠짐없이 몽땅 탐닉하는 사랑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셜리는 다른 식인의 방법, 혹은 사랑의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먹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일부 잘라내어 보관한다. 그 머리카락 매듭은 2m가 넘어갈 정도로 길고 묵직하다. 이것은 몽땅 먹어버리는 식인, 혹은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 꺼진 사랑과는 다르다. 셜리는 미련을 칭칭 감아 보관한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셜리는 매런에게도 집착하는 것이다.
셜리는 어차피 죽을 사람만 먹는다고 한다. 마지막에 셜리의 행동과 발언을 보면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리는 자신이 누구를 먹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리뷰를 보니 리는 가족이 없는 사람을 타겟으로 한다는데, 그렇다기에는 리가 사냥 전에 딱히 그 사람의 가족 유무를 파악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추측건대 리는 품행이 좋지 않은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 eater는 eater가 아닌 사람과 함께 식인을 즐긴다. 이들은 사이코 연쇄살인마 같은 인상을 준다. 특히 eater 가 아닌 사람은 굳이 식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식인 자체에 쾌감을 느껴 적극적으로 식인을 하려고 한다.
셜리의 태도는 수동적인 태도로, 리의 태도는 적극적인 태도로, eater와 eater가 아닌 듀오는 탐욕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식인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저주여도, 어떻게 식인을 할지는 오직 자신의 선택이다.
굳세게 혼자 살고 싶은 사람도 결국 사랑 없이 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을 곁에 필요로 하도록 생겨먹었다. 사람의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본능은 외로움과 괴로움의 원천이다. 어떤 태도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고를지는 이 저주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의 몫이다.
매런과 리가 평범하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비극이 찾아온다. 셜리는 매런의 거절을 납득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매런을 습격한다. 왜 이러냐는 매런의 질문에 셜리는 기분이 찜찜했다며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고 답한다. 이 대사는 감독이나 작가, 혹은 관객이 하는 말과 같다.
우리는 두 eater의 사랑이 행복하게 끝날 수 없음을 안다. 매런의 어머니도 리의 아버지도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았지만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매런과 리가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해도, 결국에 이들은 갈림길 앞에 서야 한다. 함께 있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것, 혹은 헤어져 혼자 남는 것이다.
둘의 키스 장면에서는 로맨스와 스릴러가 동시에 녹아있다. 저렇게 키스를 하다가 언제 식욕을 참지 못하고 상대를 베어 물지 모르겠다는 긴장감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손가락을 물어뜯는 사건을 영화의 시작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셜리가 언급한 'unfinished business'는 바로 이 지점이다. 둘이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리면 관객은 찜찜하다. 언제 갑자기 이 행복이 물어뜯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복한 일상은 이야기의 미결일 뿐이다.
셜리로 인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리가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달라고 요구하고 매런은 결국 리의 뜻을 받아들여 리를 먹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셜리의 난입은 두 사람에게 가능한 유일한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둘은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를 해치지도 않았다. 매런은 리를 남김없이 모두 먹을 것이고, 리는 매런의 일부가 되어 함께할 것이다.
매런의 첫 '본즈 앤 올'은 리다. 이토록 강렬한 사랑을 한번 하고 나면 다시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변화가가 생긴다. 보이지 않아도 매런의 내부에서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