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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Apr 17. 2022

산은 죄가 없지만 끝에서 1등

9. 청계산 (2021.11.27 토)




청계산은 나와 인연이 깊다. 첫 회사에 입사 후, 한 달 만에 청계산으로 야유회를 갔다. 그때는 산을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반갑지 않았다.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들에게 내 거친 숨소리를 들려주기 싫었달까. 그러나 주말이 아닌 금요일 근무 대신 가는 야유회라 거절할 사유가 없었다. 야유회 당일, 전날 저녁을 포식해서인지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그리고 나는 완등 하지 못한 채 청계산 중간 쉼터에서 다른 2명과 낙오되어 정상을 보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2021년 11월 14일, 퇴사 후 그날의 설욕을 꿈꾸며 홀로 청계산 산행을 준비했다. 분당선 청계산입구역이 아닌 4호선 대공원역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찾았다. 그리고 처참히 실패했다. 서울대공원 치유의 숲을 가로질러 등산길에 합류하는 코스였으나 입구에서 1시간 넘게 길을 헤매다가 산행을 포기했다. 패인은 트랭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출입이 불가한 통제된 길을 자꾸 알려줘서 가시덤불과 철조망을 뚫고 나오느라 정말 고생했다.


어렵사리 주차장 울타리를 넘고 나서야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바지는 흙먼지와 덤불가시로 엉망이 되었고, 얼굴은 생채기와 땀이 만나 따끔거렸다. 옳은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또다시 청계산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남들은 쉽게 다녀오는 산인데 나는 왜 이렇게 실패할까. 정상코스를 찾아 오를 수 있는 시작할 시간은 충분했지만 놀이공원에서 흘러나오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Wonka's Welcome Song> 윌리웡카 노래가 악몽 같아서 허둥지둥 그곳을 빠져나왔다.





청계산

2021년 11월 27일 토요일, 청계산에 3번째로 다녀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끝까지 나를 힘들게 한 산, 그리고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산 1위를 차지했다. 청계산은 잘못이 없어 억울할 수 있지만, 나와 잘 맞지 않는 산으로 임명한다. 그래도 정상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산행요약

매봉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중반에 사과를 먹으면서 휴식하던 중, 매봉보다 높은 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하게 코스를 바꿔 망경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군사 통신소가 들어오면서 망경대 구간의 등산로는 오래전 폐쇄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돌아가면 가냘픈 로프가 아주 위험하게 생긴 돌에 달랑거린다. 로프를 잡고 달달 떨며 올라가면 돌 위에 새겨진 '망경대' 세 글자를 만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온 길에 비하면 만족감이 떨어지는 정상이다.


'에잇'하며 돌아가는 길에 세워진 망경대 위치 안내판에서 사진을 찍으며 아쉬움을 달랜다.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다. 주차장을 코앞에 두고 군사시설에 막혀서 1.5km 정도를 빙 돌아 어렵사리 정토사에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꽉꽉 막혀있는 강남 한복판에서 교통체증을 느끼며 그나마 남아있는 에너지를 소진한다.



#산행후기

남들이 쉽다고 입 모아 말하는 길, 돌아간다고 손가락질받는 길. 어디에도 옳은 길은 없다. 쉬운 길이 만족을 준다는 보장도 없고, 돌아간다고 늦게 간다는 법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 확신을 갖기 위해선 철저한 조사가 먼저다. 나는 시간을 들여 조사하지 않았고, 원하는 결과에만 매달리다 보니 과정도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다가 허리가 요절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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