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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May 14. 2022

크리스마스를 산에서 보낸 후기

11. 선운산 (2021.12.24 금)




도립공원은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서울이 아닌 지역은 어색하다. 그래서 지방을 항상 동경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다. 서울에서 누리고 있는 생활이 다른 지역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겠지. 서울을 동경하지 않는 이유는 익숙해서다. 조금만 걸으면 바로 앞에 있는 GS25, 그리고 그 옆의 CU, 옆 옆의 미니스톱. 편의점이 즐비한 세상에 맞게 내 몸이 진화해간다는 느낌이 든다. 이미 인류의 진화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문명에 따라 끊임없이 내 몸이 변형되고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편하고 좋은 것만 찾다 보니 조금만 불편해도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부터 지방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편의가 당연하지 않은 세상으로 가면 나도 조금 더 부지런해지지 않을까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문명에 가려져 있던 내 자연스러움을 꺼내고 싶기도 했다. 인간은 언제나 경험하지 못한 것을 동경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즈음, 나에겐 큰 연중행사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있었다. 이때다 싶어서 2박 3일 지방 여행을 결정했다. 반짝이는 거리, 화려한 음악, 값비싼 음식을 먹는 크리스마스야말로 문명의 집합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명을 누리는 대신 자연을 선택했다. 12월 24일에는 항상 광란의 파티를 벌이곤 했는데, 반대되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경건하기까지 했다.


이브 당일은 선운산의 도립공원을 둘러본 후 맛있는 한식을 먹고, 오랜 친구를 만나 담소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기 위해 2주 전부터 유명 빵집에 예약을 한다거나, 누구와 만나서 어떻게 놀 것인지 고민하는 소란스러운 행위 없이 정말 자연스럽게. 서울을 떠나보니 크리스마스는 큰 연중행사가 아니었다. 그저 12월의 어느 날일 뿐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보낸 연말은 서울이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강박을 조금 덜어주었다. 이제는 서울이 아니라도 어색하지 않다.





선운산 

2021년 12월 24일 토요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등산하기 성공. 서울과 경기가 아닌 지방 산행은 처음이다. 산행 후 광주 여행을 즐길 계획이라 높지 않은 산을 고심해서 선정했다. 짧은 코스이기도 하지만 볼거리가 많은 산은 아니라서 빠르게 다녀왔다.



#도립공원도 참 넓고 좋구나

도립공원이 넓어서 주차장부터 등산로 초입까지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되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워밍업 하기 좋았던 것 같다. 다만 선운사 입장료가 인당 4,000원이어서 깜짝 놀랐다. 지금껏 다닌 산 중 가장 비싼 입장료다. '넓어서 관리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나?' 생각하고 말았다. 


산에 다니면서 이런 사소한 일들에 심드렁해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꼬치꼬치 따지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득을 본 것 같으나, 돌아보면 손해였던 경우가 많다. 따지느라 놓친 풍경, 인간관계, 기분 등은 4,000원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정상이 금방

공원을 지나 산행을 시작한 뒤에는 초집중해서 올랐다. 높지 않은 산이라 금방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스스로의 기대를 충족하고 싶었다. 훅훅 숨을 내뱉으며 패기 있게 올랐던 기억이 난다. 돌길과 흙길 이외에 풍경이 없어서 빠르게 오를 수 있었다. 카메라도 가방에 넣어버려서 사진이 없다. 찍은 사진 개수로 그날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는데, 산행하며 찍은 사진이 3장뿐인 것을 보아 나에게 재밌는 산은 아니었나 보다.



#산행을 마치며

트랭글 지도를 보면 하산 중간쯤에 기록이 멈춰있다. 그만큼 도립공원 초입에서부터 산행 시작 구간이 길다는 뜻이다. 트랭글을 너무 일찍 작동시킨 것 같다. 선운산은 산행시간만 따지면 1시간 안쪽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아담한 산이다. 산행이 너무 짧아서 정상이 아닌 하산 후 돌아가는 차에서 사과를 먹을 정도로.


산행을 마치고 도립공원에서 찍은 사진이 더 많다. 선운사 앞에 있는 예쁜 돌담에서 점프샷을 찍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다. 애달프게도 건진 사진은 없지만 덕분에 선운산에 대한 기억이 또렷해져서 글 쓰기가 수월했다. 사진도 없고, 일지도 매우 짧은 산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선운산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겐 인상 깊은 산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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