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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May 28. 2022

12월 31일, 일출산행의 맛

12. 북한산 (2021.12.31 금)



어두컴컴한 새벽을 좋아한다. 하지만 새벽 기상을 힘들어하는 편이다.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 각자 신체리듬에 맞는 기상 사이클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재보자면 아침형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일출 산행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다이어트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체중 감량이 아닌 증량을 해 온 입장에서 다이어트가 가장 어려운 법.


그런 내가 큰 마음을 먹고 일출산행을 갔다.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추위였지만 날씨에 굴하지 않고 오랫동안 해를 바라봤다. 정말 과장 없이 그동안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열정이 느껴졌다.


'맞다. 내가 이렇게 열정적이고 삶에 진심인 사람이었지.'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항상 하고 싶었던 일을 시간, 금전, 피로 등의 이유로 미뤄두었다. 그리고 하기 싫지만 우선순위가 높은 일들을 해왔다. 재미있진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생활을 유지하다가 동트는 풍경을 바라보니 이유 모를 슬픔과 묘한 억울함이 몰려왔다. 금방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외면하고 빙 돌아 어렵게 만났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고 선택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핑계를 앞세워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 핑계조차도 내가 선택할  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역시 일출과 일몰은 센티멘탈한 다짐을 하기에 최적화된 조건이다. 생각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을 , 행동으로 머리를 돌아가게 하자.





북한산

2021년 12월 31일 금요일, 한해의 아쉬움을 탈탈 털 수 있는 산행이었다. 몸과 마음이 허락한다면 매년 12월 31일은 산에서 매듭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래 탈 수 있도록 건강을 우선 잘 챙기자.



#난생처음 새벽 산행

바야흐로 2021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보통 1월 1일 일출 산행을 많이 가지만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2021년의 바지 끝자락을 잡고 조금 질척이고 싶었다. 마지막 날을 온전히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 6시에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깜깜한 밤이었다. 산 중턱쯤 나무계단을 오를 때,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니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서울을 바쁘고 황폐한 도시로만 대했을지도 모른다. 일출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감상하며 조금은 천천히 올라갔다. 너무 빠르게 올라도 정상에서 해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 것이었다.



#정상과 태양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발이 날렸다. 땀으로 젖은 머리는 땅땅 얼려서 과자처럼 바삭거렸고, 귀 끝은 아주 많이 시렸다. 매서운 바람에 눈도 못 뜨고 행렬을 따라 오르는데 노란 고양이가 정상에 먼저 도착해있었다. 복작거리는 인파 속에 자리를 잡고 보온병에 담아온 물을 따랐다. 장갑을 벗으니 추위가 손가락을 타고 전율처럼 올라왔다. 10여분을 기다리니 해가 올라왔다.



#매섭게 춥지만 좋아

해를 보며 센티멘탈한 다짐을 한 후, 종이인형처럼 펄럭이며 정상석으로 갔다. 마스크는 물론 입김으로 인해 눈썹도 하얗게 얼어있었다. 옷 속으로 여유 없이 몰아치는 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땀이 빠르게 식으며 온 몸에 얼음 결정을 만들기 전에 다급하게 사진을 찍곤 하산할 채비를 마쳤다.



#아직 아침 8시라니

밝아오는 아침 풍경에 일출 산행이 실감 났다. 올라올 때와 같은 길이지만 확연히 다른 느낌. 사실 지금까지 쓴 문장이 모두 진부해서 어쩌지 싶다. 일출 산행이 주는 강력한 느낌을 내 필력으로 담아내기 어렵다.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전달되지 못한 감상에 대한 아쉬움이 짙다. 원점회귀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8시 35분이었다. 아직 9시 전이라니. 원래대로라면 아직 침대에 누워있을 시간이다.




#산행을 마치며

하산 후에는 뜨거운 국밥을 먹었다. 그리고 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곤 2시간 정도 잤다. 수면 보존의 법칙에 따라 모자란 잠을 보충한 셈이다. 일어나서는 동네 빵집에서 조그만 케이크를 샀다. 일 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조촐하지만 확실한 축하를 전했다. 아마도 내가 보낸 12월 31일 중 최고의 하루가 아니었을까? 2022년에도 더 멋진 마무리를 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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