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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Jun 23. 2022

설산에서 마음을 씻는 방법

17-18. 축령산&서리산 (2022.02.15 화)




눈을 싫어하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는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며 기뻐하고, 어른은 길 위의 미끄럽고 질퍽이는 까만 눈을 싫어한다는 우스갯소리다. 앞의 문장은 대학교 졸업 이후 더 이상 우습지 않았다. 낭만보다는 현실을 가까이 두면서 흰 눈이 회색으로 물들어 갔기 때문이다.


회색은 네거티브의 심볼이다. 회색빛 도시, 회색빛 하늘, 회색 인간과 같이 회색은 차가움, 삭막함, 공포,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색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회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사람이 너무 거무죽죽해 보이고, 여름에는 흘린 땀이 그대로 보여 즐겨 찾지 않는 색이다.


회색빛 인생은 어떨까? 낭만을 덜어내고 현실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것은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 감성에 젖어 찰나의 선택을 하기보단 아프지만 이성적인 선택을 할 줄 알게 된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회색빛 나날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묘하게 들뜬 마음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는 겨울의 눈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싫어하려고 노력해도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첫눈이 내리면 없는 꼬리가 살랑이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 이런 내가 새하얀 설산에 가면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꼬리에 날아다닐 수밖에. 아직까지 그날의 설산을 이긴 산은 없다. 아직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축령산 & 서리산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먼 길을 혼자 떠난 것은 처음이다. 눈이 실시간으로 내리는 산을 홀로 찾아가는 것이라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이상하게 '오늘 아니면 안 돼'라는 강한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덕분에 인생 최고의 산을 만났다. 하얀 눈밭에서 마음을 한껏 털고, 하얗게 채운 기분이다.



#뚜벅이의 산행

등산은 뚜벅이에겐 잔인한 종목이었다. 매번 자동차로 이동하여 거리를 체감하지 못했다. 청량리에서 경춘선을 타고 마석역에 내려 1대만 운행하는 마을버스에 몸을 맡겨 2시간 만에 도착한 축령산 자연휴양림. 버스 안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험난하게 겪은 탓에 시작도 전에 속이 메슥거렸다.


싸라기눈을 맞으면 매표소로 걸어갔더니, 직원이 의외라는 눈으로 창구 문을 열었다.

"저보다 먼저 표 끊은 사람이 있나요?"

"아니요.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눈도 오는데."


설마 했지만   산에 아무도 없을 줄이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입장료를 냈다. 주차장을 지나 들머리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커졌다. 소복이 쌓인 눈으로 통통도로를 보며 넘어져도 많이 다치지 않겠다는 근거 없는 안도감도 차올랐다.



#생애 첫 아이젠

아이젠을 등산화에 신고 보니 '아차차' 싶었다.  것이 아닌 훈의 것을 가져왔다. 발이 240인데 300 사이즈의 아이젠을 신으니 밑창의 쇠사슬이 덜렁거렸다. 걸음을  때마다 들리는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칠칠맞은 나를 탓할 수밖에 없다. 아이젠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산행을 포기할 수도, 아이젠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모두 안고 출발한다.


 

#운명처럼 길 찾기

아무도 없는 산에서 뽀득이는 눈을 밟으며 산행하는 기분은 짜릿하다. 그리고 전율의 대가로 개척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로프가 있는 길은 줄을 잡고 가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길은 직접 만들며 가야 한다. 등산로가 전혀 보이지 않고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아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길은 연결되어 있으니 어디로 가도 정상 방향으로 가면 통하게 된다. 한참을 눈과 씨름하며 오르니 배가 고파 싸온 김밥을 꺼냈다. 허기를 달래고 계속 오르니 구름 사이로 해가 내려왔다. 빛 내림을 보고 있자니 오늘, 여기, 내가 있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정상에서 자신감 충전하기

멋진 장관을 지나 도착한 정상에서 조용히 포효했다. 쉬운 길로 가고 싶은 내면의 나와 꾸준히 싸워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과장하자면 백색 자아가 회색 자아를 이긴 기분이었다. 집을 떠나는 것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까지 확신이라곤 없었다. 아무도 내게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지 않았고,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지금보다  좋아질  있어.  잘할  있다' 목소리가 맴돌았다. 결국 나는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감 없는 나에게 설산은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주었다. 어렵게 오른 정상은 자신감을 충전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비로소 혼자가 되다

축령산 정상에서 서리산으로 넘어가는 능선을 걸으며 갑갑했던 마음을 열어두었다. 넓게 트인 길목에서 부는 바람은 속을 시원하게 훑어주었고, 사방의 하얀 눈이 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마주한 소동물의 발자국이 나를 위로했다. 고라니, 고양이, 꿩으로 추정되는 동물들아 고맙다.


2007년 개봉한 영화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에서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살지 않는 숲에서 내면의 자신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나 자신과 대면하려 한다. 이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가늠하는 것, 가장 원초적인 인간 조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신의 손과 머리 말고는 아무도 자신을 도울 것이 없는 곳에서 눈멀고 귀가 먼 돌멩이를 마주하면서.

- 크리스토퍼의 일기장 발췌


사람들과 뒤얽혀 생활하다 보면 진짜 나의 모습을 잊게 된다. 사회를 떠나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한 발짝 물러나 나를 관찰할 수 있다. 관찰 후에 나를 이해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축령산과 서리산 중간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꼈던 것 같다.



#오롯이 느끼는 정상의 멋짐

안개 낀 마음으로 입산했다가 후련한 마음으로 하산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글을 썼지만 설산에 한번 다녀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세상을 회색과 흰색의 흑백논리로 나누고 싶지도 않다. 다만 산행을 통해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마음이 힘들 때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세상을 살면서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의문이 피어날 때가 있다. 그때 군중 속에 몸을 맡기는 사람 또는 혼자만의 동굴을 찾는 사람, 2가지 부류가 있다. 나는 동굴로 들어가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부류였다.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그날의 산행도 내가 들어간 수많은 동굴 중 하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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