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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Mar 25. 2022

질색하던 산을 홀연듯 타는 이유

1. 인왕산 (2021.08.07 토)




다짜고짜 등산을 시작한 이유는 3가지다.

1. 건강해지고 싶어서

2.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3. 여행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어서


그런데 이유에 내용을 덧붙이면 말이 길어진다.

여기에 병마, 직장, 성향을 더하면 완성되는 이야기


1. 건강해지고 싶어서 / 그때는 건강하지 않았다

2021년 7월 17일,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태릉선수촌에 격리되었다. 원래도 바닥을 밑돌았던 건강을 모조리 잃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어능력까지 저하되어 한국말 못 하는 한국인이 되었다. 그래서 '건강해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나를 뒤덮었던 시기였다.


2.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 회사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전 회사에서 내 하루를 올인했다. 일과가 끝나면 잘 시간이었다. 오피스에서 시들해져 가는 내 모습이 슬펐다. 속세에 찌든 나에게 생기를 주기 위해서 자연을 찾았다. 자연보다 효과적인 건 퇴사였음을 지금은 알겠다.


3. 여행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어서 / 집에만 있어서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도통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이 부지런히 여행 다닐 때에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별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람들이 맨날 도대체 뭐하면서 지내냐고 물어봤다. 나도 내가 뭐하는지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자 여행을 곁들인 그럴듯한 취미를 만들었다.





인왕산

2021년 8월 7일 토요일, 인왕산에 다녀왔다. 동네 뒷산이라는 후기를 보고 껌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출발했다. 그리고 등산을 하면서 맵싹한 졸음껌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도 없이 산에 오르다

인왕산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초입의 지도. 지하철 노선도도 잘 읽지 못하는 내가 구불구불한 산길 지도를 읽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도심에 있고 유명한 산이니 발 길 닿는 데로 가다 보면 정상이겠지! 기대감과 자신감에 부푼 나는 물 한 병 없이 맨손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많이 휘발되었는데도 목이 심하게 말랐던 건 선명하다.



#돌이 이렇게 예쁘다고?

인왕산 풍경을 완성하는 건 돌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성곽 돌길이 시멘트 건물과 초록 숲의 가교 역할을 하며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날씨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나에게 머리끝까지 신나버리는 날씨가 주어졌다. '역시! 날씨요정도 내 첫 산행을 응원하는구나'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돌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느낀 날.



#안전, 안전, 안전!

낮은 산이라고 무시한 사실을 인정한다. 철계단이 놓여있는 범바위에서의 아찔한 기억도 난다. 산의 높이와 무관하게 산에는 베테랑이 없다. 항상 안전에 유의하며 준비물을 빈틈없이 챙겨야 한다. 나는 베테랑도 아니고 준비물도 안 챙긴 대가로 무서움과 갈증을 얻었다. 정상을 도착했을 때,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땀에 젖어 꼬불거리는 앞머리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올라오느라 힘들었지? 내려갈 때도 힘들단다

정상에서 바라본 뷰는 정말 아름답다. 끝내주는 경치에 다음엔 야등을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신나는 마음으로 하산한다. 그런데 내려가는데 다리가 벌벌 떨렸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의 운동이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살려달라며 아우성치는 순간의 연속이다. 산에서는 올라갈 때만큼이나 내려갈 때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 똑같은 길로 가기 싫은 갈대 같은 내 마음. 남들이 안 가는 하산길을 골라서 모험을 시작한다. 익숙한 성곽길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산길을 발견한다. 앞서가는 중년의 등산객 두 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겹게 따라가지만 삐걱거리는 무릎은 이미 역부족이다.


혹시 대낮에 인왕산에서 길을 잃어보셨나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데 민망할 만큼 코앞에 있는 샛길을 발견해서 뚝 그치고 다시 내려갔다. 안 그래도 땀 잔뜩 흘리고 목마른데 눈물까지 흘려서 수분을 손실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두 짝을 이끌고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니 둘레길 지점이었고 의도치 않은 쿨 다운을 하게 되었다. 몰랐는데 인왕산 둘레길은 꽤 길다. 터덜터덜 걷다가 종로도서관을 만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도심 속 나 홀로 모험기 종료.


도심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물 500리터를 단숨에 마셨다. 버스에 몸을 싣고 등산 기록을 확인하며 그제야 트랭글이 중간에 꺼진 것을 확인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녔구나.' 어찌 됐든 상관없다. 그리고 기절한 채로 버스에 실려서 안전하게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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