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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리 Sep 18. 2022

속 시원하게 말 못 하는 사정들

22. 불암산 (2022.03.22 화)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지만, 어떤 비밀은 연기처럼 감출 수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의 행동에서 그의 상황을 짐작하는 경우가 있듯이.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 의아한 지점들이 생기면, '나라면 왜 그럴까'를 생각하곤 한다. 역지사지 덕분에 세 치 혀로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을 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도치 않게 타인의 아픈 부분을 건드린 일도 많을 것이라 짐작한다.


비밀을 간직한 채로 산에서 위로받고 싶다면, 혼자 조용히 산행하면 될 것을. 불현듯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로움에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산행을 선택한다. 미주알고주알 하지 않고 스몰토크만으로도 충분한 관계. 가끔은 스쳐가는 답변에 생각지 못한 감동을 얻는 가늘지만 놀라운 관계가 그립기 때문이다. 관계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찾는 이상한 현상이다.





불암산

2022년 3월 22일 화요일, 4호선 상계역에서 가까운 불암산. 가슴이 답답해지면 망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도심 산이라 좋다. 어렵지 않게 큰 바위를 타며 올라가다 보면 산이 쉽게 내어준 풍경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포토스팟도 많은 만큼 맑은 날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5명의 새로운 얼굴들

들머리에서 맹하니 기다리고 있으니 나와 비슷한 차림의 사람들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눈이 마주치고 어색한 웃음과 함께 단번에 오늘의 일행인 점을 알아챘다. 15분가량 기다리니 전원이 모여,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해가 강한 날이었기에 다들 모자를 쓰고 왔다.


나는 산악회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2번째 산행이었다. 각자 참석한 산행 횟수와 다녀온 산 이야기를 하며 스몰토크의 서문을 열었다. 6명이면 꽤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이라 한 마디씩만 답변해도 시간이 쑥쑥 잘 갔다. 숨 고를 시간이 있다는 점이 참 다행이었다.



#초면이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뚜렷하게 말하지 않아도 다들 어떤 상황과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감이 왔다. 그들도 화요일에 불암산에 함께 오르는  상황을 짐작했을 것이다당시 나는 쉬고 있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지쳐있던 심신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말도, 탈도 많았던 재직기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여정을 채비하기에는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이 으레 묻는 어느 회사를 다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등은 묵음 처리되었다. 덕분에 과거와 미래에 매몰되어있던 마음에 잠시 평화가 왔다대신 어떤 하늘을 좋아하는지, 무슨 간식을 즐겨먹는지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질문들은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류라 답변하는데 시간이 걸렸는데, 질문자도 산을 오르느라 숨이 벅찼기 때문에 답변을 재촉하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사람들

서로를 배려하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정상에 다 같이 모여 앉았다. 외투 색깔이 마치 약속한 것처럼 조화로워서 사진이 잘 나왔다. 빨강, 분홍, 라임, 노랑은 내가 소화하기 힘든 색깔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채색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선택 반경을 제한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정상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각자 싸온 간식을 나눠먹었다.



#산행을 마치며

가뿐한 마음으로 하산하여 '다음에 또 만나자'는 간단한 인사로 일행들과 헤어졌다. 헤어짐 역시 가벼워서 부담이 없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밥을 함께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집에 도착해서 혼자 버섯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나의 시끄러운 속사정을 말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였다.  비밀을 풀어내야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것도 아니었구나. 여러모로 고마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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