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명성산 (2022.04.23 토)
10월의 억새꽃 대신 늦봄의 진달래를 보러 갔다. 어떤 꽃이든 보는 것은 좋지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구간이 있으므로 코스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계절과 관계없이 오르는 내내 푸르른 산정호수가 기분을 정화시켜 주어서 좋았다.
#새 신발, 새 마음
대전에 다녀오고 등산화가 묘하게 불편해졌다. 하루이틀 고민 끝에 먼지가 붙어도 티가 안 날 것 같은 새 등산화를 마련했다. 소비 기념으로 명성산에 진달래를 보러 갔다. 도봉에서 포천까지는 광역버스를 타고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출발한 시각을 포함하면 이동시간으로 3시간, 왕복 6시간!
산에 다니면서 이동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불편한 버스좌석과 한 몸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은 놀랍다. 멀미가 심하지만 잘 이겨내고 있다. 멀미에 지쳐 슬라임이 된 채 명성산 초입에 도착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 삼각김밥을 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진달래와 함께한 굽이굽이 산행
이파리 없이 앙상한 계절에 강렬한 해를 쐬며 산 길을 걷는 일은 쉽지 않다. 쭉 올라가기만 하면 하산의 기대감이 티끌처럼 모여 증폭될 텐데, 굽이굽이 오름과 내림을 반복해서 걷다 보면 '하산할 때도 지금처럼 힘들겠구나'란 생각에 맥이 탁 빠진다. 조막만 한 그늘막도 없어 죽죽 나는 땀을 닦으며 걷다 보니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이럴 때는 필사적으로 기분을 환기해야 한다. 누군가 가라고 등 떠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두운 얼굴로 노동하러 산에 온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틀어 흥얼거려 본다. 청각을 통해 차갑게 식은 기분을 워밍업 했으면, 다음으론 시각을 즐겁게 해 줄 요소를 찾는다. 연분홍의 진달래를 보며 사진을 찍고, 고개를 들어 청량한 하늘에 얼굴을 파묻는다. 초코바 또는 과일을 섭취하며 미각을 자극하는 것도 좋다. 많은 것이 제한된 산 위에서 내 기분은 나 하기 나름이다. 찰흙처럼 기분을 빚어본다.
#호수에 풍덩 빠지고 싶은 날
잘 빚은 기분으로 산을 오르다 보면 억새밭이 나온다. 10월 중순쯤 오면 억새꽃을 한가득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민둥산이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정자에 올라가 과일을 먹었다. 햇볕에 얼굴이 따끔거려 선크림도 추가로 발랐다. 뱃속과 피부를 다시 무장한 뒤, 풍경을 휘휘 둘러보며 걸으면 발걸음 끝에 정상을 만나게 된다.
안개가 없는 날이라 정상에서 포천 산정호수가 환하게 보인다. 동네잔치를 하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저 멀리 들린다. 어떤 이야기로 하하 호호 웃음꽃을 피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 같다. 정상과 축제, 2가지 요소가 합쳐져 내 마음을 붕 뜨게 했다. 이대로 붕붕 날아 호수에 푹 빠지고 싶었다.
#산행을 마치며
예상대로 하산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바람에 무릎이 시큰했다. 준비한 물도 다 떨어져서 갈증이 났다. 억겁의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멍하니 걸은 것 같다. 아주 지친 얼굴로 내려오니 시원한 계곡물이 있었다. 출입금지된 영역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물개처럼 박수를 치며 과감하게 입수했다.
발도 씻고, 손도 씻고, 세수도 하고. 하산하며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 무더기도 계곡물이 떠나보냈다. 오늘도 산에서 빚은 좋은 기분만 마음에 담아 떠난다. 그리곤 또다시 광역버스 안 슬라임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