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으로 성숙하고 육아로 성장하는 부부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내게 머뭇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낸다.
“나, 있잖아.
한 두어 달 정도 당신이
민이 어린이집 등 하원 하는 거
모두 다 해주면 안 될까?”
그 이유는 엑셀 프로그램을 배우고 싶어서 컴퓨터 학원을 다니고 싶단다. 그런데 집에서 왕복 3시간은 걸리는 지역이라 둘째 민이의 하원이 어렵다는 남편의 이야기였다. 말을 어렵게 꺼낸 남편이 무색할 정도로 알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말이 두 달이지. 내게는 꽤 긴 시간처럼 여겨졌다. 내가 하는 일이 월초가 되면 업무가 가장 바쁜 시기인데 남편이 둘째 하원을 맡지 못하니까 마음이 조급해진 건 사실이다. 최대한 야근하지 않으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집중력을 발휘해 업무를 처리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민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집에 큰아이와 둘이서만 있게 하고 야근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불평도 불만도 없었다.
남편이 십 년을 넘도록 다닌 직장을 그만뒀다. 직장을 다니면서 2년 동안은 새벽과 저녁을 활용해 인터넷 강의로 자격증 준비를 했었다. 습관처럼 해오던 새벽 축구 운동도 빠지지 않고 오히려 잠을 줄여가며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흔히 혼자만의 고독한 공부라는 인터넷 강의만으로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일을 도전해서 열심히 고군분투 중이다. 지금 남편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일이고 생소하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만큼은 신입사원이기에 더욱 배워야만 한다.
사실, 십 년을 넘도록 다녀온 직장에서 퇴사를 결심한 남편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건 아니다. 복지가 잘 마련되어있어서 아이들 대학 등록금 걱정은 없겠다며 아이들 학비 걱정은 미리 숨통 트고 있었는데 퇴사가 웬 말이더냐. 남편은 심오한 이야기를 꺼냈다. 마흔 춘기를 앞두고 흔들리는 중년의 삶, 그리고 불안한 노년의 삶을 그려가고 있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는데 정년퇴직 후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퇴직 후에는 둘째 아이의 학자금도 생각해야 하는 미래의 우리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립하고 난 뒤에도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아버지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마흔 사춘기를 앞두고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직장이 무조건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내렸다. 무작정 퇴사할 수는 없어서 직장을 다니면서 자격증 공부를 했고 나는 그 뒷바라지를 했다. 뒷바라지야 남편이 방에서 공부하면 거실에서 두 아들을 맡았고, 남편이 주말에 도서관을 가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바닷가든 어디로든 떠났다.
《메모 습관의 힘》에서 신정철 저자는 오래가는 관계의 비밀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성장을 추구하고 있고, 당신의 배우자에 의해 그것을 이룬다면 이 과정에서 당신의 배우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우자의 자기 확장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본인 자신에게도 매우 즐거운 일이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고 자신을 확장하며 성장하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자기 확장의 욕구라고 한다. 뉴저지 몬머스 대학에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배우자를 통해 자기 확장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관계에 더 헌신적이고 만족한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남편으로 인해 자기 확장 경험을 많이 했다. 10년간 해온 일의 슬럼프로 공부방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적극 지지해줬다. 첫 책 《워킹맘 홈스쿨, 하루 15분의 행복》을 집필하기 위해 동네 카페에서 글을 쓰는 동안 남편은 두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집안일을 했었고 출간 후 서울과 경기도로 강연 갈 때에도 운전기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나에게 고마운 남편이기에 나 역시 남편의 자기 확장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아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로서 성장하는 방법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당장 눈앞에 가져다주는 월급에 현실에 안주하려고 했을 테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부모 역시 성장해가야 하기에 중년, 노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당장 현실만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니라 남편처럼 먼 미래를 그려보고 또 자식들에게 먼저 인생을 살아가는 선배로서 좋은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매일 아침, 전날 저녁에 먹은 그릇들과 아침에 먹은 그릇을 설거지한다. 엽이는 식탁에 앉아 등교 전까지 수학 연산 학습지를 푼다. 그때마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영어 강의를 들으면서 강사의 질문에 소리 내어 영어로 답한다. 큰 아이는 그런 내 모습을 뒤에서 바라본다. 엄마는 설거지하며 영어 공부를 하고 큰 아이는 식탁에 앉아 수학 학습지를 푸는 이 일상이 나중에 아이에게 큰 자산이 되지 않을까?
'공부란. 학교 졸업과 동시에 끝나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다.'
남편이 2년 동안 직장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한 말이다. 큰 아이에게 대학을 졸업했다고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라, 아빠도 직장 다니면서도 공부하고, 또 이 공부가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공부를 시작할 거라고.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말이 아니라 부모로서 먼저 보여줄 수 있어서 더 큰 본보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든 배움이 쉽고 만만하지는 않았다. 여자로 태어나 내 몸집보다 더 큰 기계 속에서 조종할 경험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고의 위험, 안전의 위협으로부터 위축되지 않을까? 이 느낌은 내가 처음 운전대를 잡았던 두려움이었다. 운전면허증을 취득 후 8년 동안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장롱면허였다. 신분증 제출용으로 쓰이던 운전면허증을 실전 자격증으로 쓰기가 참 두려웠다.
‘내가 전방 주시와 양방 주시,
심지어 눈 미러로 후면 주시,
거기에다 신호등 주시까지
모두 가능할까?’
‘운전 미숙으로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사실, 처음부터 운전이 두려웠던 건 아니었다. 면허증을 취득하려고 학원을 등록하는 순간까지는 운전은 희망찬 도전이었다. 하지만 실수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착각해서 사고를 낸 기억이 있어서 운전은 더욱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동차는 내 몸집보다 큰 기계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겁이 많은 나는 시도조차 못 했다. 하지만 운전을 꼭 해야 하는 시기는 아줌마가 되고 나서였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지금처럼 하원은 남편 담당이었다. 회식이나 야근이 있어 상황이 안 될 때는 퇴근 후 나는 회사 앞으로 콜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택시 운전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저씨, 저 여기서 아이만 얼른 데리고 나올 텐데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다시 집으로 가야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린이집에서 엽이를 데리고 나오는 사이 택시 기사는 우리 집 가는 방향으로 차를 돌려야 했다. 집에 도착하면 거스름돈을 받기가 죄송스러워 사양했다.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을 다녀오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불편함의 연속이었다. 이런 모자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남편이 경차를 망설임도 없이 덜컥 구입해서 운전 연수를 해줬다.
시동조차 켜지도 못하고 출발도 못 해서 버벅 거렸던 내가 지금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편하게 다니고 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이제는 혼자서 운전하는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선곡해서 창밖 바람 쐬며 혼자 운전하는 시간은 작고 사소한 일상이지만 내게는 꿈꿨던 미래이기에 더없이 행복하다. 두려웠던 운전대를 이제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도 겁이 많아 두려웠던 일들을 하나둘씩, 용기 내어 실천하고 해내는 성취감은 어쩌면 아이들을 위해서 도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지도 모른다. 혼자였으면 나 혼자만 챙기면 되는데 지금은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는 현실에서 앞으로 나는 더 많은 용기를 내야 하고 더 많은 도전을 해야 한다. 그건, 부모로서 먼저 경험하는 인생 선배로서 아이도, 부모도 함께 성장해가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