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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욕심많은워킹맘 Nov 09. 2017

워킹맘의 딸이 워킹맘에게

워킹맘의 딸이 워킹맘 엄마에게 쓰는 글

사진출처 픽사베이

나는 워킹맘이다. 나는 두 아들을 낳고 서른 평생이 넘도록 지금도 여전히 워킹맘의 딸로 살아가고 있다. 워낙 없이 시작했던 부모님이셨기에 먹고살기 힘들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삶이었다. 곁에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여동생과 나는 둘이서 컸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내 나이 7살, 그때 동생 나이는 5살, 나는 학교를 가야 하는데 그날따라 동생은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 불고.... 엄마는 일하러 가고 없고.. 아빠는 외국으로 나가셨고.. 창피하다고 따라오지 말라고 협박해도 울면서 나를 따라오는 여동생이다.



초등학교에서 수업 듣는데 정연찬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내 동생을 발견했다. 코질질 흘리는 여동생이 안쓰럽게 보였는지 키가 작은 편에 속하던 내 앞줄과 달리 맨 뒷줄 빈자리에 동생을 앉히게 하셨다. 그런데 동생이 수업 시간에 자다가 오줌을 쌌다. 반 친구들이 놀리고 상황이 수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담임 선생님은 그때 당시 큰돈으로(내 기억엔 동전이었는데 얼마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돌려보내셨다. 깔깔깔 오줌싸개로 놀리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그 순간 얼마나 창피하였는지 모른다. 



아빠는 외국에 출장 가셨고 엄마는 일하러 가시고 동생과 나는 그렇게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보냈다. 친구처럼 엄마처럼 동생처럼 때로는 언니처럼 그렇게 단 둘이 의지하며 보냈다. 학교를 마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다른 친구들은 엄마들이 우산을 들고 마중을 와도 나와 동생은 서로 기다리다 둘이서 쓸쓸히 가방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집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 그리고 집에 오면 반겨주는 이는 없었고 저녁을 챙겨주는 엄마도 없었다. 둘이서 스스로 저녁을 챙겨 먹어야 했고 집에 있어야 했다. 그때 당시 연탄불을 피워놓으면 일하러 나간 엄마가 우리가 일산화탄소 중독이 될까 걱정이 되어서 가까이 사는 사촌 오빠에게 우리들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촌 오빠도 친구이랑 약속이 있어서 놀러 나가야 하는데 외숙모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오긴 왔던 모양이다. 사촌 오빠는 외숙모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왔으니 "너네 집에 들어가지 마! 알았지? 오빠는 친구들 만나러 가야 하니까 대문 밖에서 놀아!!!" 하지만 외로웠던 우리는 집에 누군가 오면 그게 너무 좋아서 사촌 오빠한테 가지 말라고 달라붙었다. 하지만 사촌 오빠는 어린 동생이 걱정되기보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은 순수한 아이뿐이었다.  


하루 24시간 중 나는 가장 외로운 시간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직도 다 큰 성인이 되어도 황금빛이 물드는 해 질 녘이 되면 어린 시절 향수가 풍긴다. 친구들과 한창 재미있게 소꿉놀이하거나 고무줄놀이하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하나 둘 동네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람아 밥 먹으러 와라! 이제 집에 들어와" 

"무곤아! 밥 먹으러 와라! 이제 해 떨어진다! 집에 와야지! 아빠 오실 시간이다!"


대문 너머 동네 엄마들의 잡으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황금빛이 물드는 해질 무렵 동네 길목에 쓸쓸히 남아 있는 건 나와 동생뿐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친구들과 상황 놀이를 할 때면 난  인형 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면 늘 '엄마'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그 결핍....  엄마가 해질 무렵 "은영아! 밥 먹으러 와라! 저녁 먹자!"라는 연극으로 내 내면의 결핍과 상처를 위로했다. 



 그때는 내 내면의 상처와 결핍을 위로하기에 바빴던 삶이었는데 막상 내가 워킹맘으로 살아오면서 이제는 느낀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우리들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시금 느낀다. 

일하면서도 우리가 저녁은 챙겨 먹었을지 걱정하는 우리 엄마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하면서 누구에게 맡길 곳 없이 외롭게 크는 우리들에 대한 미안함

공부하고 싶다는 딸을 일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들

시집가는 딸에게 뭐하나 근사하게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들


우리 앞에서 삼켰던 엄마의 눈물들을 워킹맘으로 살면서 깨닫는다.



우리 엄마,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을지

우리 엄마, 얼마나 수없이 고민했을지

우리 엄마, 얼마나 현실과 이상에서 힘들어했을지

이제야 나도 자식을 낳고 엄마로 살면서 깨닫는다. 



우리 앞에서 모든 감정들을 삼키고

씩씩하게 즐기면서 일을 사랑해 온 우리 엄마,


그래서 난 고맙다. 감사하다.


서른 넘고 아들 둘 낳은 그냥 아줌마인 나에게

어제 만나도 오늘 만나도 늘 버릇처럼 말하던 엄마의 그 말....


'내가 다른 건 못해줘도 너 하고 싶다는 공부, 그 공부 뒷바라지는 해줬어야 했는데.. 그게 내 평생 한이다"


엄마 덕분에 나, 아이들에게 홈스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 덕분에 항상 열정을 지니고 살고

엄마 덕분에 일하는 게 즐겁고 

엄마 덕분에 꿈을 사랑하는 여자로 살고 있다고

엄마 덕분에 아줌마가 아니라 '꿈꾸는 엄마'로 살고 있다고

엄마가 좋아서 워킹맘이 좋다고



엄마 고마워...

엄마,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씩씩하게 살아줘서 고마워....

엄마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도 내 꿈, 내 일 포기하지 않고 욕심을 현실로 이루면서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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