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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Oct 11. 2015

맥주, 가장 좋은 동반자

(Feat. 지나친 음주는 지방을 가져옵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카페인을 흡수하지 못하는 몸이기 때문에.

나는,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끊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도박을 하지 못한다.

겁이 많은 천성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참 많은 중독들을 용케 피하면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술이다.


어린 시절, 퇴근한 부모님이 매일 저녁 반주를 즐기시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쓰고 맛없고 다음날이면 피로함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부모님의 퇴근 길에는 어김없이 소주 두 병이 담긴 검은 봉지가 함께했다.


천성일까. 그저 취하는 즐거움에 술맛을 제쳐두고 즐겼던 이십 대 초반과 달리 지금의 나는 술을 꽤나 즐긴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일을 마치면 아침의 결의는 잊은 듯 항상 맥주 두 캔이 담긴 비닐 봉지와 함께 퇴근했다.

여행을 할 때면 늘 가장 좋은 경치에서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가장 슬픈 날에도, 가장 기쁜 날에도 사람은 없어도 맥주는 있었다.


혼자인 삶이 익숙해지자 술은 동반자처럼 다가왔다.

외롭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극한의 외로움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술은 그랬다. 내게 가장 고요한 시간을 줬고, 꿈 없는 잠을 선사했다.


두브로브니크의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마신 맥주 두 캔을

스플리트의 석양을 바라보며 들이킨 맥주 한 캔을

런던 브릿지에서 일행과 나눈 맥주 한 캔을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사람들과 왁자지껄 함께한 와인을

포지타노에서 이글거리는 태양과 함께한 고소한 생맥주 한 잔을

기숙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마신 소주 한 병을

세느 강변에서 기울인 맥주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삶이 겹겹이 쌓이자 술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리라는 기대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됐다.

도리어 살아가며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완성해주고 있으니까.


특별히 크로아티아에서의 시간들은 고되고 지치고 외로웠기에

술을 더 가까이 했다. 그래서 그날의 생채기들은 아물지 않고 아픈 그대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시간들을, 그 상처들을, 그 고통을.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돼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나던 마지막 날까지 내 손엔 맥주 두 캔이 담긴 비닐봉지가 늘 함께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서 '뼈밖에 없던 애가 왜 이렇게 통통해졌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술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늘 하면서도 나는 빈 맥주잔을 들고 말한다. "여기 500 추가요!" 그저 술을 좋아하는  어린아이가 돼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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