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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Nov 04. 2015

잃었을 때 얻은 것들

(Feat. 악몽에서 벗어나기)

런던에서  첫날은 그저  시작일뿐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돌아가는 날까지 험난한 여정은 계속됐다.


첫 번째 악몽

런던 근교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의 대학교 근처로 방문했다. 마침 시험이 끝나 파티가 있다며 나를 초대했다. 하지만 나 같은(영어 못하고 내성적인 동양 여성) 사람은 즐길 자리가 아니었다. 덕분에 사들고 간 맥주만 들이키다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나오려고 하니 친구가 다른 친구 집으로 가자며 나를 끌고 갔다. 그곳엔 대마초를 흡연하는 이들로 가득했고, 제정신일까 싶은 이들을 한참 구경했다. 2 연타 노잼의 시간을 보내고 기차역에 가려하니 웬걸 교통편은  택시뿐이었다. 그마저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추위에 1시간을 기다렸다. 대학 내에 위치한 클럽에서 꽐라 돼 경찰에게 끌려가는 한 남학생을 보는 것을 끝으로 영국 유학에 대한 로망은 바이 바이. 그리고 기차역까지 택시비 13파운드를 결제했고, 런던에 도착하니 막차마저 놓쳐 또 한 번의 택시. 


두 번째 악몽

한국 음식이 그리웠기에  런던에서 음식 잘한다는 한인 민박을 찾아 갔다. 엄마 같은 인상에 참 좋은 분이었으나 사실 지나치게 엄마 같았다. 인터넷이 잘된다며 꼭 여자 방에서 드라마를 보셨고, 옷부터 일정까지 모든 것을 지나치게 챙기시는 분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약 정리를 제대로 못해 나는 이 방, 저 방, 이 침대, 저 침대를 옮겨 다니며 8박을 채웠다. 처음 본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자기까지 했다. 짐도 마음대로 옮기는 바람에 데이터 발송하던 노트북 전원도  꺼졌고(10시간짜리 2시간 남은 상태에서... 부들부들), 심지어 마지막 이틀은 다른 민박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세 번째 악몽

"Help me!" 이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어야 했다. 돌아보지 않아야 했다. 커다란 체구의 흑인은 나를 불렀고, 순진했던 나는 반응했다. 다가온 내게 그는 재빨리 손목에 실가닥을 걸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영어로 내게 질문했고, 어느새 내 손에는 낯선 팔찌 하나가 완성돼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15파운드" 일단 무서웠고,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던 나는 돈을 주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허무했다. 끼니도 아껴가며 여행했던 내가 사기를 당하다니. 


네 번째 악몽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주말의 마켓. 인터넷이 되지 않아 길을 잃었고, 와이파이도 잡을 수 없어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친구를 2시간 동안 기다렸다. 갑작스레 비가 왔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다섯 번째 악몽

돌아가는 날, 공항 버스를 놓쳤다...



큼지막한 악몽만 늘어놔도 그날의 당혹스러움이 엄습한다. 슬픈 사실은 내가 잊었거나 너무 사소해 나열할 수도 없는 악몽들이 더 있다는 것. 런던은 내게 이런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런던을 가장 잊을 수 없는 여행 장소로 꼽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에서 얻은 것들 때문이다.


친구를 통해 여행자로서 알 수 없던 현지인들의 내밀한 일상을 볼 수 있었고, 오지라퍼에 가까운 민박집 아주머니를 만났지만 함께 지낸 사람들과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다. 한 번의 사기를 당한 덕분에 그 어디에서도 나는 시크하게 사기를 피해갈 수 있었고, 인터넷의 중요성을 깨달은 후에야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심카드를 구매했다. 물론 여전히 공항 버스 시간과 비행기 시간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비행기를 놓친 적은 없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수 십 번의 악몽 속에서도 사실 한 번도 괴로움에 몸서리 친 적은 없었다. 설상가상의 상태에서 나는 내가 잃은 것보다 잃음을 통해 얻은 것들에 더욱 집중했기 때문이다. 런던 전까지의 나는 돈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아니 런던 여행  첫날까지도 그런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첫날, 내가 잃은 돈보다 더 큰 교훈을 얻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돌이켜보면 돈을 잃지 않기 위해 건강과 사람, 시간, 꿈을 대신 버렸던 삶이었다. 그토록 악착 같이 지켜낸 돈들은 순식간에 야금야금 사라졌다. 대신 나는 8박 9일 동안 수 많은 경험과 영감, 한국에서까지 이어진 좋은 인연들,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잃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그저 얻을 것에 대한 정당한 지불이었다. 


흔히들 끔찍한 시간들을 회고하며 '악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악몽은 말 그대로 나쁜 꿈이다. 그리고 꿈은 깨어나면 끝이 난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길몽이 현실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듯 악몽도 스스로 깨고 나오면 된다. 악몽은 현실을 직접 간섭하지 못한다. 하지만 꿈을 꾼 주체인 내가 악몽에서의 기분과 느낌을 털어내지 못하면 현실에서도 계속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잃은 순간은 악몽이었지만 눈을 떠 내 손에 쥐어진 것들을 살펴보니 나는 결코 잃은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의 현실은 괴롭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화가 날 때면, 슬플 때면 상실감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힘들었던 내가 어떤 일에도 가벼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이때부터 였다. 생각이 전환되자 평화가 찾아왔다.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 것도 잃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럴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곁에 있는 어떤 것을 잃어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자해하는 삶은 런던에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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