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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Jun 16. 2016

지우기 전, 다시 보자

사진은 순간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필름으로 사진을 시작하고, 필름으로 과제를 했으며, 필름으로 졸업 작품을 했지만 결코 필름주의자는 아니다. 필름만큼 디지털을 많이 사용했고, 졸업 이후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부분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했다. 디지털 환경에 살아가는 만큼 이보다 편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의 느낌을 사랑하지만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용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다. 이제 더는 현상액도, 필름도, 인화지도 구하기 쉽지 않은데다 결국 스캔이라는 디지털적인 과정을 통해 사진을 보고, 보여주는 것에 이상한 회의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리하고 좋은 디지털 사진이지만 단점도 엄연히 있다. 바로 '속도'다. 과정을 빠르게 만드는 속도가 덫이 돼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왜 일까. 우리는 촬영을 하고, 바로 LCD를 통해 확인한 후 별로라고 판단되면 바로 삭제한다. 컴퓨터에 옮겨 프로그램으로 셀렉 과정을 거치고 남은 사진은 다시 보는 일이 없다. 필름을 할 때도 밀착 인화 후 사진을 선택하고, 인화한 후 다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문제는 삭제다.


최근 열린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 전시는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 대한 고민과 함께, 디지털 사진은 얼마나 많은 사진이, 얼마나 다양한 이유로 폐기되는지 그 현실이 궁금해졌다. 필름 사진은 완전히 소거해버리지 않는 이상 물질적으로 남아있으나, 디지털 사진은 손가락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Fujifilm X30, Dresden, Deutschland, 2015

하지만 사진은 오직 촬영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촬영 후 사진을 선택하는 것도, 선택된 사진을 보정하는 것도, 보정한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도 모두 '사진'이 완성되는 과정 중 하나다. 우리의 시각과 사진의 시각이 비슷할 것이라 믿을 수 있겠지만 사진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진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Fujifilm X30, Berlin, Deutschland, 2015

석양이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었고, 충분히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여분의 사진을 살펴보다 이 사진을 다시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구석에서 하품을 하는 여성이 함께 담겼기 때문이다. 촬영 당시에는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Fujifilm X30, Berlin, Deutschland, 2015

촬영되는 순간을 잡아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1초도 빠르게 느껴지는데 1/4000초, 1/8000초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엄두도 나지 않는 시간을 사진가는 진정 제 몸처럼 다룰 수 있는 것일까. 촬영 순간을 우리가 지배한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오만이 아닐까. 수많은 행운과 타이밍이 겹쳐 결국 내 카메라 안에 그럴듯한 사진 한 장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인지할 수 없는 시공간을 담는 우리가 진정으로 사진을 응시하는 것은 오히려 촬영 이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시각으로, 인간의 시간으로 담긴 세상을 바라보면 단순히 촬영하고 바로 볼 때 찾을 수 없던 여러 가능성을 찾아낸다. 그리고 가능성이 발견된 사진은 더이상 폐기 대상이 될 수 없다. 

Fujifilm X30, Berlin, Deutschland, 2015

촬영을 하다 보면 '이거다!' 싶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막상 컴퓨터에 띄어보면 생각보다 아쉬움이 느껴질 때가 많다. 확실한 주제는 있으나 주변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 느낌이 모자를 때도 있고, 생각보다 지저분한 배경에 넌더리가 나기도 한다. 한편 밍숭맹숭하게 느껴졌던 NG 컷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다. 

Fujifilm X30, Berlin, Deutschland, 2015

스냅을 촬영하다 보면 '실패로 보이는' 사진도 많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면, 잘 짜인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이 아닌 보다 날 것의 느낌을 지닌 사진이 의외로 좋을 때가 있다. 흔들리고 초점이 나가도 그 나름의 느낌이 묻어나는 사진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 순간 나만의 구도와 틀, 노출이 지루해질 때도 있다. 

Fujifilm X30, Berlin, Deutschland, 2015

사진은 시각 매체인 동시에 시간 예술이다. 촬영 시 시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도 있지만 시기, 시대에 따라 사진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해석된다. 회화와는 다른 시간 개념을 갖고 있다. 사진은 촬영 당시에 '정보 전달', '객관적' 속성에 중점을 두고 활용된다면, 시간이 흘러 그 사진은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자료가 된다. 여전히 객관성이란 속성에 초점을 두고 말이다.


공적인 것을 넘어 사적인 시간에도 사진은 침투한다. 휴대폰 속 1년 전 사진, 페이스북 속 3년 전 사진, 미니홈피 속 10년 전 사진은 사적 기록이자 역사다. 그리고 당시에 올린 사진을 지금 다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감정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사진을 다시 본다는 것은 가장 단적으로 이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 단순 반영 속 실제 모습. 이 모든 것을 촬영 후 바로바로 삭제했다면, 좋은 사진을 우선 선택하고 남은 것을 지웠다면, 1년 후 다시 발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단순 정보 제공을 위한 사진은 한 번 거르게 되고, 사진 자체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그때 그 기준에 부합하는 사진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모든 사진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진을 보는 내 시선이 바뀐 것이다.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처럼,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다시 한 번 사진을 보자. 그리고 1년, 2년 전 사진이 남아있다면 꺼내보는 것이 어떨까. 어떤 사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맞게 익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눈이 알맞게 익었음을 알아볼 수 있는 레벨이 됐을지도 모른다.

Fujifilm X30, Paris, France, 2015

그리고 '망한 사진', '실패한 사진'이라고 여기고 메모리 카드에서, 하드에서 깔끔하게 지워버린 사진이 많다면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사진들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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