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에 관한 무겁지 않은 이야기
* 긴 글을 읽고 싶지 않거나 시간이 없다면, 과감하게 요약으로 내려가셔도 됩니다.
우리의 눈이 항상 세상을 컬러로 인식하는데 반해 카메라는 태생적으로 흑백 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사진을 시작했다. 첫 사진, 첫 현상, 첫 밀착 인화, 첫 인화까지 모든 시작은 흑백이었고, 모든 이론적 베이스도 흑백으로 시작했다. 당시에는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을 좋아했다. 컬러 필름이 보여주는 세상의 색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낮의 흑백 스냅은 물론 여전히 컬러만큼 낯설지만, 밤의 흑백은 그 자체로 현실처럼 여겨졌다. 태양빛을 상실한 세상은 정말 흑백 사진 속 한 장면처럼 보였으니까. 그래서인지 사진을 배운 나의 첫 작업은 깊은 밤을 주제로 했다.
디지털로 점철된 사진 세상에서 아날로그 사진의 위치는 점점 좁아져갔다. 하지만 여전히 흑백 필름의 매력을 주장하는 이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창기 디지털 사진의 흑백이란 색상을 빼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은 여전히 발전했다. 자유자재로 흑백의 세상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까.
위 두 장의 사진은 각각 다른 카메라로 촬영됐다.
하나는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하나는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로.
첫 번째 사진은 미러리스 카메라의 흑백 모드를 활용한 사진이다. 두 번째 사진은 똑딱이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다. 상황도 카메라 상태도 다르지만 흑백 사진의 노이즈와 콘트라스트는 서로 닮아있다.
사실 디지털 흑백을 애용하게 된 것은 퀄리티의 문제가 아니다. 필름을 현상, 스캔하기 위해 충무로로 가야 하거나 직접 온도계와 비커, 커다란 약품 통과 씨름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귀찮았기 때문이다. 감도의 한계로 인해 야간 스냅 촬영은 꿈도 꿀 수 없고, 증감한 ISO 6400 사진은 차마 손이 가지 않았던 것도 한몫을 한다.
사진에 색이 빠졌을 때, 두 배로 중요해지는 것이 구도
사진 이론 서적에는 교과서적으로 설명한 구도 이론들이 있다.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 3 분할이라든가, 게슈탈트 현상이라든가. 늘 배우고 배워서 프레임을 잡는 짧은 순간에도 뻔한 구도를 만드는데, 사실 흑백 사진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혹은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그래서인지 흑백 사진을 좋아하지만 여전히 어렵고, 여전히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찾기 어렵다.
필름처럼 조금씩 다른 카메라의 성격
디지털카메라 자체가 흑백 사진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차이를 경험하고 나니 제법 마음에 드는 톤을 만들어주는 카메라를 사고 싶어 진다. 아래 세 장의 사진은 올림x스 PEN F로 촬영한 사진이다. 노이즈나 콘트라스트 등을 카메라 내에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후보정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선 커다란 장점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귀찮음이 극에 달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말 그렇다. 이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정말 필름으로 돌아갈 일은 영영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메인 사진과 아래 두 장의 사진은 스냅 카메라로 유명한 리코 GR2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렌즈가 일체 된 똑딱이 형 카메라는 더욱 자연스러운 흑백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쓰니 너무나 리뷰 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상세한 비교를 해본 적은 없으나 리코의 흑백은 개인적으로 다소 매끈하게 느껴지는 편.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취향이기에 비교라고 하기 무색하다. 리코는 개인적으로 컬러가 더 마음에 든다.
색이 있으나 마나 한 곳에서의 흑백.
서울에는 그런 곳이 참 많다. 특히 지하철. 색이 있어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혹은 애매한 색상이 사진의 집중도를 낮출 때 아예 색을 빼버리곤 한다. 또 해가 없는 저녁에도 흑백 사진을 즐겨 촬영한다. 감도를 높이다 보면 다방면에서 노이즈가 튀기 마련이다. 이때 흑백은 일단 가장 보기 싫은 색상 노이즈를 가려준다. 그리고 노이즈 억제 기능을 끄고 난 후 흑백 모드는 더욱 매력적으로 변한다.
사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지만, 카메라가 어떤 원리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는 겉으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폰보다 좋은 화질이면 그럭저럭 비상용으로 언제든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화질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필름이면 어떻고, 디지털이면 어떻나'라고 하기에 사진 무식자로 불려도 할 말은 없지만, 내가 경험한 디지털 흑백은 생각보다 좋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좋다. 편리하기 때문이고, 제법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제목도 '디지털 흑백'이라고 특정하지 않고, 그저 흑백 사진이라 통칭했다.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점은 나에게도 흑백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있다는 것이다. 필름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흑백 사진은 적당한 노이즈와 콘트라스트가 있어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완전히 디지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흑백 사진을 카메라에 있는 모드 중 하나로 생각할 텐데, 그들에겐 그것이 표준일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필름 시대 사람들이 열심히 흉내 내는 특징들을 습득하고, 그 특징이 곧 흑백 사진이라고 말할 날이 올 텐데, 그 상황이 제법 기대된다.
노이즈 억제 기능은 흑백, 특히 고감도 촬영에서 크게 장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일부러 억누른 느낌이라 화질 나빴던 미니홈피 시절의 사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고감도 흑백 촬영을 할 땐 노이즈 억제 기능도 억제하고 촬영하길 추천한다. (물론 기종마다 다를 수 있다)
사진 찍는 것이 지루해졌다면, 도저히 필름은 엄두를 못 내겠지만 궁금하다면. 책상 서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512MB, 2GB, 4GB 같은 오래된 메모리를 장착하고, 흑백 모드로 전환한 후 딱 주어진 만큼만 찍어보길 권한다. 연사는 어림도 없고, 더 찍기 위해서 한 장, 한 장 지워야 할 텐데, 평소보다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약간의 귀찮음이 더 좋은 사진을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속는 셈 치고 해봐도 좋다.
요약
1. 디지털과 필름 흑백의 차이 많이 줄었음
2. 귀찮으니까 디지털 흑백
3. 흑백에선 구도가 갑
4. 요즘 카메라는 흑백에서도 특색 있음
5. 그래도 굳이 살 필요는 없음
6. 우중충한, 미세 먼지 가득한 서울에서는 흑백이 제격
7. 고감도+노이즈+흑백= 필름 흑백 같음
8. 디지털카메라로 귀찮고 싶다면 2GB 메모리 추천